“진짜 전쟁 안 나겠지?”

2015.09.08

[백가흠의 눈]“진짜 전쟁 안 나겠지?”

바야흐로 여름휴가철이 지나고, 가을이 올 차례다. 비온 뒤 하늘은 높아졌고 여름을 몰아낸 듯 그늘 안에 바람은 차다. 지난여름,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계곡이라도 다녀올까 싶었지만, 누구에게나 쉬운 휴가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빠듯한 살림살이가 신경이 쓰이고, 시절도 뒤숭숭해 그냥 집에서 편안히 쉬려는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보다 많았다. 집 근처에서 외식이나 영화를 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 이가 많았다. 휴가철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계곡이나 바닷가 근처는 한산했고, 도심의 밤은 불야성이었다. 한철을 애타게 기다려왔던 상인들의 울상이 크기만 했다. 여름이 그냥 지나갔다. 앞으로도 그냥 지나갈 것이 더 두렵다.

지난여름, 어디를 가도 휴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어지럽기만 했다. 우리가 사는 터전 곳곳은 위험한 지대가 된 지 오래 전이고, 사람들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방학 때가 되면 짐을 싸서 그간 밀려 있는 원고를 쓰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돈다. 지겨운 뉴스, 방송, 기사를 피해 숨는다. 솔직히 지겹다. 내게 휴가는 그런 것들과 무심히 지내는 것이 전부다. 여름을 부안 곰소항 근처에서 지냈다. 이곳의 여름 사정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다. 여름휴가철의 대목은 옛말이 된 듯 주말에도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메르스 초기대응 실패로 엄청난 혼란이 일었고, 경기침체로 이어져 대부분의 국민들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곤혹스러운 여름을 났다. 정작 메르스 초기대응에 실패했음에도 고통을 당한 병원 관계자, 격리자, 환자 등 누구에게든 정부의 어떤 책임 있는 설명이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을 보면,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씁쓸하기만 한 뒷맛을 거둘 수가 없다. 아무 기대도 없었지만 그래도 좀 나아지겠거니 했던 바람도 지겹다.

봄도 여름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다음에 어떤 영문일지 모르는 또 다른 재난에 대한 공포와 보호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부추긴 채 메르스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리고 이제 가을 문턱, 다시 북한문제다. 이건 뭐, 데자뷰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결과도 언제나 그랬듯이 똑같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가기 전 본가에 들렀다. 부모님은 여름 한낮 도로가에 핀 풀처럼 시들어 있었다. 겨우 여름을 났는데 다시 여름을 만난 기분이었다. 한상 차려내는 어머니를 보자 마음이 쓰렸다. 어머니 주름을 씹어먹는 듯 자꾸 쓴맛이 돌았다. 다 먹어야 어머니 마음 편할 터, 나는 이 많은 음식을 어떻게 다 먹어치울까 걱정뿐이었다. 어머니는 평소 내 걱정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어머니는 내 옆에 바짝 붙어 내 걱정 말고 다른 걱정을 했다. “그러니까 전쟁은 나지 않겠지?” 처음엔 무슨 말이지 몰랐다. 나는 기사, 뉴스에 신경을 끄고 간만에 소설을 쓰는 중이었으니까. 지뢰가 터진 줄도 몰랐고 북한과 긴박한 대치상황인 줄도 몰랐다. 몰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네 엄마가 자꾸 종편채널을 본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종편채널이 쉽고 재미있다고 했다. 뭔 소린지 잘 모르겠는 기타 채널보다 알아듣기 쉽고 편한 노인들을 위한 방송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만 전쟁이 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근에 위성채널로 바꿔드린 게 후회됐다. 종편채널이 선명하게 더 잘 나온다. 집에 올 때마다 종편채널을 지우고 가길 여러 번이었지만 매번 살아나 있다. “젊은 애들은 그런 걱정 안 하는구나. 진짜 전쟁 안 나겠지?” 집을 나서는 내 등에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겨우 보낸 여름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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