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바고

이범준 기자
2015.08.18

형사사건에서 성공보수가 무효라는 지난 7월 23일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은 기자단의 만장일치 엠바고 설정으로 하루가 지나 보도됐다. 그 사이 인터넷에는 판결 내용이 모두 퍼졌다. 이 때문에 대법원 판결의 효력시점까지 애매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주간경향 1138호 참조) 왜 기자단이 대법원의 거듭된 요청을 뿌리치고 보도를 미뤘는지 모두의 내심을 알 수는 없다. 그날 저녁 잡혀 있던 검찰 간부와의 술자리가 분명히 영향을 준 것으로 대법원은 보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해당 언론사들은 여러 설명을 내놓았다. “법원 판결은 법리적으로 복잡해 발표되자마자 기사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 내용을 분석하고 판단을 종합해 기사를 작성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이나 형법 간통조항 위헌결정은 사나흘쯤은 지나야 제대로 보도가 된다. 사회가 기자에게 원하는 것은 판례 평석 수준의 분석이 아니며, 또 그런 기사가 흔하지도 않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기자단의 간사를 2년 정도 맡은 적이 있다. 이전까지 간사들이 행사해온 권한을 모두 포기해 대법원장을 따로 만나지도, 검찰총장을 독대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날 기자단이 아닌 언론사에서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청에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거부했다. “대검찰청에 직접 요구해서 받는 수밖에 없다. 기자단은 가입사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다.” 기자단은 그 성격이 이익조합이다. 일본에서는 한 출입사에 3~4개의 기자단(기자클럽)이 경쟁하면서 정보와 이익을 공유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재 대법원을 비롯해 대부분의 출입처는 기자단이 하나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출입처에 막강한 교섭력도 가져 왔는데, 힘의 근원은 정보 통제, 보도 유예에 있었다. 이제 세상이 달라져 완벽한 보도 유예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오판에 의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에 기자단이 여럿이었다면 법조계를 뒤흔든 판결이 다음날에야 보도되는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간사를 하는 내내 14일간 포괄적 엠바고 설정에 죄의식을 느꼈고, 그만두면서 더 이상 엠바고를 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고백컨대 나는 지금까지 판사들의 위법을 알고도 다른 판사와의 인연이나 대법원과의 관계 때문에 눈 감은 적이 있다. 반 년 뒤 다른 신문의 보도로 해당 판사가 직을 그만둔 경우까지 있었다. 그 사실을 보도한 동료 기자가 나의 취재 사실을 알고, 기사를 내보내는 날 아침 내게 전화했을 때의 부끄러움을 잊지 못한다. 기자에게는 진실을 보도할 권리가 있을 뿐이지 유예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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