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병맛 TV드라마 ‘천국의 계단’

2015.05.26

물론 시청률은 높았지만 아마 나처럼 고소한 병맛 보러 TV를 켜는 시청자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아등바등 사는 고학생이라 TV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드라마가 방송되는 날 친한 언니네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까지 했다.

10년도 지났지만 생각만 나면 데굴데굴 떽데굴 구르면서 웃다 굴러 떨어지곤 하는 드라마가 있다. 그것은 바로 2004년 방송된 드라마 <천국의 계단>. 그 이후 거의 TV를 보지 않았으니 세상 일을 따라잡기엔 이미 틀렸다. 아마 내가 한국에서 <무한도전>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지 싶다. 어쨌든 이 드라마에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던 최지우와 신현준이 출연했다. 한창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의 권상우가 스타덤에 올랐고, 김태희가 신인 시절 단정하게 올백으로 넘겨 묶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표독하려 애쓰면서 눈을 부릅뜨던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기획의도는 네 사람의 청춘이 각각 천국으로 통하는 계단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물론 시청률은 높았지만 아마 나처럼 고소한 병맛 보러 TV를 켜는 시청자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아등바등 사는 고학생이라 TV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드라마가 방송되는 날 친한 언니네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까지 했다. 언니는 신혼이었건만 고맙게도 한 번도 가정방문을 마다하지 않고 맞아들여 둘이서 킬킬거렸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한 장면에서 최지우와 권상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한 장면에서 최지우와 권상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 최지우
교수인 아버지가 여배우였던 이휘향과 재혼을 하는 바람에 신현준(아역 이완), 김태희 남매와 한가족이 되어버린 여주인공 최지우(아역 박신혜). 착한 최지우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지만 새로 생긴 오빠는 친절해도 새엄마와 새 자매 김태희와는 찬바람이 쌩쌩 돈다. 최지우가 갖고 있는 건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호시탐탐 드러내는 딸을 위해 새엄마인 이휘향은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새엄마 때문에 최지우는 큰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권상우가 그나마 위로가 된다.

새 오빠와는 오빠 동생으로 잘 지내고 싶은데 어째 의붓오빠가 최지우를 보는 눈빛은 영 수상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어른이 된다. 커서 최지우가 되었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의붓자매도 김태희로 컸다. 그리고 김태희는 음주운전을 하다 승용차로 최지우를 깔아버린다. 의식불명이 된 최지우를 데리고 친아빠 성한용에게 찾아가서 아버지로서 해준 게 뭐가 있냐며 사후처리를 부탁한다. 신현준은 사랑하는 최지우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최지우는 목숨은 건졌지만 전형적으로 드라마 여주인공들이 걸리는 바로 그 병,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신현준은 고민하지만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원래 우리는 결혼할 사이였노라고 ‘썰’을 푼다. 신원 불명의 화상 환자와 최지우의 신분증을 김태희가 바꿔치기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틀이 맞는다. 결국 최지우의 이름도 바꾸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함께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권상우는 김태희의 공세에도 절대로 넘어오지 않고 최지우를 계속 그리워한다. 재벌 2세인 그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의 이름은 무려 ‘글로벌 그룹’.

더 풀면 끝이 없을 테니 최지우는 당연히 기억 회복, 김태희의 권상우 포획 시도 불발, 김태희가 낸 교통사고가 원인을 제공해 최지우의 시력 상실, 신현준이 자신의 각막을 최지우에게 주기 위해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자동차로 낭떠러지에서 추락, 그 병원은 대기표도 없는지 기가 막히게 최지우에게 그 안구 기증, 최지우와 권상우 마침내 결혼, 그러나 결국 교통사고 및 유전 등으로 인해 발생한 안암으로 인해 최지우 사망. 그리고 권상우는 웬 바닷가에 틀림없이 부하직원들 쌔빠지게 부려먹어 날라 놓았을 흰색 그랜드 피아노를 딩동거리며 끝나는데…. 이 마지막회는 시청률 40%대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그 40%에 일조한 나는 자지러지기 위해 매번 TV 앞에 앉았다. 그만큼 병맛이 쩔어줬다. 특히 그 육상! 두둥 두두두둥, 하면서 <아베 마리아>라는 곡이 들려오면 아까 말한 언니와 나는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뛴다! 뛴다! 이제 누가 뛰는 거야! 가장 많이 달렸던 건 물론 달리는 모습이 폼 났던 권상우였다. 그런데 어찌나 잘 달리는지 버스에 최지우가 타고 있는 걸 보더니 “정서야아아아아아!” 하고 외치며 권상우가 정장에 구두 신고 달려서 버스를 따라잡아 버렸다. 최지우도 달렸다. 만만치 않게 잘 달렸다. 경찰에 체포되어 가는 신현준이 탄 순찰차를 따라 달려 결국 해당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신현준이 경찰에 체포된 이유는 그림을 위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위작이 무려 라파엘로였던가 미켈란젤로인가 그랬다. 그가 팔아먹은 게 이발소 그림도 아닐 테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신현준의 모습.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신현준의 모습.

아들을 경찰서에 신고한 건 이휘향 엄마인데 112를 누른 다음 목소리를 깔고 여보세요, 경찰이죠, 누가 모작을 팔아요…. 그러자마자 경찰이 잡아갔다. 놀라운 행정력이었다. 어찌어찌 김태희와 약혼하게 된 권상우는 식에서 입을 드레스와 구두 같은 것을 사러 함께 가는데 최지우를 동반한다. 그러면서 김태희에게 뭐 하나 사줄 때마다 최지우에게도 드레스와 구두를 하나씩 사준다. 당연히 김태희는 황당하고, 최지우도 언짢다. 송주 오빠(권상우)가 왜 그래? 하고 묻자 최지우는 말한다. “드레스, 맘에 안 들어. 구두, 안 맞아.” 정서(최지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어쨌거나 식장에서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두 여인이 있고 우리의 송주 오빠는 갑자기 “제가 결혼할 여자는… ” 하며 최지우 쪽을 쳐다본다. 하필 그 타이밍에 경찰이 식장에 들이닥쳐 위작 혐의로 신현준을 붙잡아가는 바람에 최지우는 드레스 차림으로 순찰차를 따라잡아 경찰서까지 따라간다. 그래서 우리의 권상우는… 그냥 김태희와 식을 진행해 버린다! 그는 그냥 결혼을 하고 싶었나 보다…. 아무 여자라도 괜찮았던 거야, 송주 오빠? 막판에 시력을 잃은 최지우를 위해 안구를 주려고 눈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며 신현준은 이렇게 외친다. “정서야, 오빠가 있다!” 안구가 즉시 최지우에게 이식되는데, 권상우가 재벌 2세다 보니 이건 뭐 장기매매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믿고 싶었던 모양
육상만큼이나 열심히 권상우와 최지우는 소리를 꽥꽥 질렀다. “정서야!” “송주 오빠!” 그리고 권상우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부메랑을 던지며 외쳤다. “한정서(최지우)! 사랑은 다시 돌아오는 거야!”

지금도 울적한 일이 있거나 할 때 나는 마음속에 꼬깃꼬깃 접어둔 <천국의 계단>을 꺼내서 한 층 한 층 복기한 다음 킥킥 웃었다. 그때는 그냥 그게 마냥 ‘병맛’이라 재미있는 건 줄만 알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다음 떠올려 보니, 아마도 그렇게 깔깔대던 스무 살 언저리의 나는 사실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어디엔가 있다고.

부메랑을 던질 줄도 모르면서 사랑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뭐가 사랑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게 나한테도 차례가 돌아올 것이라고. 먹고 사느라 아등바등대고 그걸 견딘답시고 죽도록 술을 퍼마시고 늘 후회하면서 사느니 아예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안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통증도 없이, 항암제 투여 같은 것도 없이 조용히 자는 것처럼 예쁘게 어떤 남자 품에서 잘 죽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 남자가 흰 피아노를 서해안 물때에 맞춰 모래사장에서 용달차로 날라와서 딩동딩동 쳐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두둥 둥두두 두둥, 하면서 <아베 마리아>가 나올 때는 사실 내가 달리고 싶었던 거였다. 그 남자를 태운 순찰차를 달려서 따라잡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충만한데, 결국 나는 언제나 그가 어느 차에 탔는지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죽도록 뛰어서 버스 정류장을 주파한 끝에 결국 내가 탄 버스를 붙잡아주길 바랐건만 번번이 나는 내가 지금 몇 번 버스를 탔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 드라마가 그렇게 우스웠던 이유는 <천국의 계단>의 층층마다 알알이 들어찬 기막힌 상투성이 바로 내 안의 병신력과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병신은 바로 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김현진 컬럼니스트>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