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와인의 거성 필리핀 여사를 추억하며

2014.11.04

파리에서 유명한 배우로 활동하던 필리핀 여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의 무통 로칠드를 있게 한 와인업계의 거성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무통 카데’나 칠레의 명품와인 ‘알마비바’도 그녀의 작품이다.

피레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대서양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300㎞를 달려 오랜만에 다시 보르도를 방문하였다. 보르도는 부르고뉴와 함께 프랑스 와인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부르고뉴 와인이 여성적이고 관능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것과 대조적으로 보르도는 강건하고 남성적인 성격의 와인을 생산한다. 단일 품종을 고집하는 부르고뉴와는 달리 여러 포도품종을 배합하여 만든 보르도 와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합성과 더불어 미묘한 와인의 향기를 더욱 발현시키는 특별함이 있다. 또한 양조기술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의 도입을 통해 세계 와인산업을 이끈 일등공신이다. 그래서 보르도는 단순히 프랑스 와인산지 중 하나가 아닌, 전 세계 와인의 표준이 되고 세계 와인산업을 선도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855년 세계만국박람회 때 결정된 그랑크뤼 등급제도는 160년 동안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메독 와인 중 5개 등급으로 나눠진 총 61개의 그랑크뤼 와인의 등급제도는 1973년에 샤토 무통 로칠드가 1등급으로 승급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포도밭을 중심으로 등급을 매긴 부르고뉴와는 달리 당시의 와인 판매가격을 참고하여 생산자인 샤토를 중심으로 등급을 정하였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그랑크뤼 1등급 와인메이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아름다운 정경.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그랑크뤼 1등급 와인메이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아름다운 정경.

세계 와인의 표준이자 선도자인 보르도
보르도 지방의 유명 와인 생산지는 보르도 시내 주변에 발달해 있다. 오늘날 보르도가 세계 와인의 중심지로 우뚝 솟은 것은 일차적으로 좋은 품질의 와인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는 자연조건에 있겠지만 이밖에도 지정학적인 이유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켈트족과 로마제국의 정복을 시작으로 이곳은 1000년 동안의 혼란과 암흑기를 거쳐 1154년 비로소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게 된다. 그것은 아키텐 공국의 엘레오노르 공주가 후에 영국의 왕이 된 헨리 2세와 결혼하여 300년 동안 보르도는 영국의 영토가 되었고, 대부분의 와인을 영국에 쉽게 수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서양으로 통하는 넓은 지롱드 강은 수출항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년전쟁으로 보르도가 다시 프랑스의 영토가 되면서 와인산업은 일시적으로 침체되었지만 18세기부터 다시 영국, 독일, 신대륙으로의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생 줄리앙의 그랑크뤼 와인메이커 ‘샤토 레오빌 바르통’의 오너가 거주하고 있는 ‘샤토 랑구아’. 18세기의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생 줄리앙의 그랑크뤼 와인메이커 ‘샤토 레오빌 바르통’의 오너가 거주하고 있는 ‘샤토 랑구아’. 18세기의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생 줄리앙 마을의 바다 같은 포도원
보르도 시내에는 당시의 부로 건설한 수많은 건물들이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와인과 함께 또 다른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보르도에서 북쪽으로 지롱드 강 좌안 D101지방도로를 따라 메독 지역의 생 줄리앙까지 가는 길은 온통 익어가는 포도밭과 연한 핑크색을 머금고 있는 회색석회암으로 지어진 보르도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필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생 줄리앙 마을에 진입하기 전 왼편에 펼쳐져 있는 샤토 탈보의 드넓은 포도원이 마치 바다처럼 느껴졌다.

부티크 레스토랑인 율리우스에서 점심을 끝내고 생 줄리앙의 그랑크뤼 와인 생산자인 ‘샤토 레오빌 바르통’을 찾았다. 생 줄리앙은 마고, 포이악, 생테스테프와 함께 메독 지역에서 최고 명품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마을이다. 18세기 초 보르도로 이민 온 아일랜드 상인인 토마스 바르통에 의해 설립된 이 와이너리는 1826년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샤토 레오빌의 포도원 일부를 구입하여 샤토 랑고아와 함께 현재의 와인명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레오빌 바르통 외에도 레오빌 푸이페레, 레오빌 라스 카스 등 레오빌을 쓰고 있는 그랑크뤼 등급이 3개나 된다. 마케팅 담당 마갈리 여사의 안내로 먼저 오래된 와인셀러, 전형적인 18세기의 건축물과 정원을 가진 아름다운 샤토 랑고아를 구경하였다. 와인의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와이너리의 특징은 오너인 안토니 바르통이 보르도의 다른 와인메이커들과 달리 샤토에서 거주하며 직접 밭을 돌보고 와인 생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시음은 아직도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2013 레오빌과 랑구아로 하였다. 아직 젊어 입 안을 조이는 타닌이 느껴지지만 깊고 오래 지속되는 향기는 그랑크뤼 와인의 존재감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최소 10년 이상의 숙성을 거쳐야만 그 진가를 발휘할 것 같았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극찬했던 그랑크뤼 와인메이커 ‘샤토 그뤼오 라로즈’ 소유의 포도밭 전경.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극찬했던 그랑크뤼 와인메이커 ‘샤토 그뤼오 라로즈’ 소유의 포도밭 전경.

생 줄리앙의 또 다른 그랑크뤼 와인인 ‘샤토 그뤼오 라로즈’는 일찍이 와인 애호가였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주불대사 시절인 1778년 보르도 와인 투어를 하는 동안 4개의 1등급 그랑크뤼 와인의 바로 뒤를 이을 2등급 와인으로 지목한 와인이다. 그뤼오 라로즈는 실제로 185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2등급 와인으로 지정됐다. 제퍼슨의 와인에 대한 지식과 혜안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인 최초의 포도 재배자로 알려진 제퍼슨 대통령은 은퇴 후 1807년 고향 버지니아의 몬테첼로 저택 주변에 2곳의 포도원을 조성하였다. 비록 필록세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와인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열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뤼오 라로즈 방문을 마치고 ‘샤토 무통 로칠드’를 방문하기 위해 필자는 생 줄리앙에 인접해 있는 포이악으로 향했다.

필자의 멘토였던 ‘샤토 무통 로칠드’ 오너 ‘필리핀’ 여사(왼쪽)와 Wine MBA졸업식 기념사진.  필리핀 여사는 얼마 전에 작고하였다.

필자의 멘토였던 ‘샤토 무통 로칠드’ 오너 ‘필리핀’ 여사(왼쪽)와 Wine MBA졸업식 기념사진. 필리핀 여사는 얼마 전에 작고하였다.

‘무통 로칠드’는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필자에게 무통 로칠드는 특별한 곳이다. Wine MBA 시절을 보냈던 보르도에서의 2년은 단순히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즐겼던 추억들만이 아니라 이곳을 대표하는 샤토들의 초청으로 세미나와 만찬, 그리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고 와인을 만드는 노력과 철학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무통 로칠드이다. 2001년 보르도 경영대학원에 개설된 최초의 Wine MBA의 멘토가 바로 무통 로칠드의 오너 ‘필리핀’ 여사였는데, 얼마 전 80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는 외신을 접하고 특별한 슬픔을 느꼈다. 그녀의 초청으로 만찬도 하였고, 특히 전 세계 와인업계 지도자들과 저널리스트 등 약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샤토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졸업식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졸업식에서 오픈한 샤토 무통 로칠드 1983년산 레드 와인만도 100병이 넘었었다.

‘샤토 레오빌 바르통’에서 시음한 그랑크뤼 와인들.

‘샤토 레오빌 바르통’에서 시음한 그랑크뤼 와인들.

파리에서 유명한 배우로 활동하던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의 무통 로칠드를 있게 한 와인업계의 거성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무통 카데’나 칠레의 명품와인 ‘알마비바’도 그녀의 작품이다. 사실 이번 여행길에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 인터뷰도 하고 예술적인 지하셀러와 박물관을 집중적으로 취재하려 하였으나 상중이어서 샤토가 문을 닫아 부득이 사진촬영으로 만족해야 했다. 작렬하는 9월의 태양 아래 샤토 무통 로칠드는 단아하고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열정적이던 그녀를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공허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프랑스 그랑크뤼 역사 118년 만의 유일무이한 사건, 무통 로칠드가 1등급으로 승급한 1973년, 그들은 레이블에 ‘First I am, Second I was, Mouton does not change’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 비록 필리핀 여사는 사라졌지만 이 문구처럼 무통 로칠드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글·사진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