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천재’ 허인회 필드의 베컴 꿈꾼다

2013.11.19

허인회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베컴을 좋아했다. 베컴처럼 돈도 많이 벌고
멋진 스타플레이어이자 자상한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11월 1일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인 헤럴드&KYJ 투어 챔피언십 4라운드. 전날까지 3타 차 단독 선두로 마지막 조에서 경기한 허인회는 티오프 40여분을 앞두고 가장 늦게 대회장에 도착했다.

2시간 전에는 골프장에 도착해 샷 연습과 스트레칭을 하고 나가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연습 그린에서 공을 몇 개 굴려보고는 1번홀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허인회는 “연습은 경기 날 아침이 아니라 평소에 해야 하는 것”이라며 “스트레칭은 1번홀 티샷을 한 뒤 걸어가면서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지난 1일 허인회가 제주도 서귀포시 롯데스카이힐 골프장 힐·오션코스에서 열린 헤럴드·KYJ 투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있다 | KPGA 제공

지난 1일 허인회가 제주도 서귀포시 롯데스카이힐 골프장 힐·오션코스에서 열린 헤럴드·KYJ 투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있다 | KPGA 제공

프로 6년차 허인회는 프로 데뷔 뒤 줄곧 ‘게으른 천재’로 불렸다. 국가대표를 거쳐 루키였던 2008년 필로스오픈에서 우승했지만 그는 ‘열심히’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필로스오픈 이후 5년 동안 우승을 못하는 사이 “연습을 안 하니 부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연습 안 하는 선수’라는 이미지는 더 강해졌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인회는 시즌 마지막 대회 출전을 앞두고는 열흘 가까이 클럽을 한 번도 잡지 않았다. 올 초 시작한 사업(수입 자동차 중계)에 시간을 빼앗기면서 대회 1라운드 아침에 연습장에서 공을 몇 번 쳐본 게 전부였다. 

허인회는 “시간이 충분했어도 연습을 많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는 연습 좀 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평소의 내 방식(루틴)을 깨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소대로 대회를 준비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첫날 1언더파 공동 13위로 가볍게 몸을 푼 허인회는 둘쨋날 코스레코드를 2타나 줄인 7언더파를 적어냈다. 16번째 홀인 7번홀(파4)에서는 140야드를 남겨놓고 친 샷이 그대로 홀에 빨려 들어가는 행운의 이글까지 나왔다. 허인회는 “뒤땅, 톱볼 같은 도깨비 샷을 쳤는데 운이 많이 따랐다”고 말했다.

3라운드에 이어 4라운드에서도 행운이 이어졌다. 뒤땅, 톱볼 같은 프로들에게 좀처럼 보기 힘든 미스 샷을 계속 냈지만 그 도깨비 샷이 행운의 바운스가 되면서 버디로 이어졌다. 최종 합계 12언더파. 2위를 4타 차로 물리친 허인회는 “그동안에도 연습을 안 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안 했기 때문에 우승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연습을 안 하고도 우승할 수 있다는 게 나도 신기하다”고 말했다.

스피드 즐기는 4차원 꽃미남
허인회가 원래부터 연습을 게을리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한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골프를 시작했다. 하루에 6~7시간씩 연습 볼과 씨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6개월 만에 9홀 2언더파를 친 그는 아마추어 무대에서만 23승을 거뒀다.

고3 때는 국가대표 상비군을 건너뛰고 바로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올 시즌 KPGA 투어 상금왕 강성훈과 지난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퀄리파잉(Q) 스쿨에서 수석 합격한 이동환 등이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다. 허인회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땐 더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쳤다. 그만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강성훈·김경태 등에게 밀려 태극마크를 달지 못한 뒤 그의 골프 인생은 달라졌다. 실의에 빠져 1년 반 정도 골프채를 놓고 지낸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시 클럽을 잡고 2007년 프로가 됐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허인회가 10월 31일 헤럴드·KYJ 투어챔피언십 3라운드 4번홀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치고 있다 | KPGA 제공

허인회가 10월 31일 헤럴드·KYJ 투어챔피언십 3라운드 4번홀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치고 있다 | KPGA 제공

코스에 있지 않는 시간에는 오토바이, 모토 레이싱 등에 광적으로 빠져들었다. 허인회는 “주니어 시절에 만날 혼나면서 억지로 골프를 하다 보니 실력은 어느 정도 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하고 아버지가 매를 들지 않게 되자 연습이 하기 싫어졌다”고 말했다.

허인회를 수식하는 단어는 ‘게으른 천재’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허인회는 골프에 대해 말할 때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말을 쏟아내는 탓에 ‘이단아’ ‘4차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반항기 있어 보이는 모습에 ‘풍운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도 불린다.

거침없는 언변으로 오해도 많이 받는다. 허인회는 2008년 첫 우승 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 “미국에 가면 도박에 빠질 것 같았다. 파친코에는 관심이 없어 일본을 택했다”고 말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허인회는 “내 언행과 부잣집 아들에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이미지 때문에 안티가 많다”며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유로운 영혼은 맞지만 예의가 없는 스타일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거짓으로 나를 보여주기보다는 솔직한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범상치 않은 허인회를 떠올릴 때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필드에서의 패션이다. 폴로셔츠에 모자를 쓰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스폰서 로고가 없는 빈 모자를 쓰거나 그때그때 선호하는 브랜드의 모자를 쓰기 때문이다.

‘꽃미남’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을 추가한 허인회는 “톡톡 튀는 스타일을 좋아하고 패션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모자를 쓰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프로 데뷔 후 한 번도 메인 후원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범하지 않은 허인회가 좋아하는 행운의 숫자는 ‘4’다. 그래서 전화번호 끝자리도 4444, 자동차 번호는 4000번을 쓰고 있다. 허인회는 “4는 한국에서 좋지 않은 의미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부자들이 선호하는 숫자”라고 했다.

골프를 취미처럼 즐기는 게 목표
헤럴드&KYJ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날 허인회의 집에는 폭풍우가 지나갔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아들이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허인회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가 매를 드셨다. 갈등도 많았지만 나에 대한 기대가 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했다.

우승과 함께 시즌이 종료됐지만 허인회는 더 바빠졌다. 논현동에 사무실 오픈을 준비하면서 고객 상담을 받느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허인회는 “직원은 20여명쯤 된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더 안정적으로 골프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인회의 꿈은 사업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잡고 골프는 평생 취미처럼 즐기면서 투어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허인회는 “억지로 골프를 했던 어린 시절보다 요즘에 골프가 훨씬 재밌어졌다. 아이러니할지 모르지만 골프를 평생 즐기면서 가끔 우승을 하고 싶다. 50세가 넘어 시니어 투어에도 나가고 싶다”고 했다.

허인회가 좋아하는 이는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다. 축구선수로서는 물론 사업가로 성공해 큰 부를 이뤘고, 멋진 인생을 살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허인회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베컴을 좋아했다. 베컴처럼 돈도 많이 벌고 멋진 스타플레이어이자 자상한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게으른 천재 허인회는 노력은 건너뛰었다. 하지만 헤럴드&KYJ 투어 챔피언십 우승은 그가 서서히 골프를 즐기는 법을 깨달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즐기는 사람이 강하다.

<이지연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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