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꿈과 우리시대 지식인의 초상

2013.08.06

이 기획에서 이제까지 다루지 않은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지식인 문제다. 나 자신이 이 집단에 속해 있기에 지식인 문제를 객관적으로 말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에 대한 시국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지식인은 어느 시대이건 나름대로 중요한 책임을 맡아 왔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원효·의상과 같은 승려와 강수·최치원과 같은 유학자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역사 속의 지식인들은 진리를 탐구하고 현실 개입을 통해 사회개혁을 모색했다. 진리 탐구와 현실 참여가 지식인의 양대 정체성을 이뤄온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새롭게 가다듬어 완성시킨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지난 5월, 야간개장한 경복궁 근정전에서 시민들이 고궁의 밤 정취를 즐기고 있다. | 홍도은 기자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새롭게 가다듬어 완성시킨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지난 5월, 야간개장한 경복궁 근정전에서 시민들이 고궁의 밤 정취를 즐기고 있다. | 홍도은 기자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식인들을 들라면 나는 세 사람을 꼽고 싶다. 세 사람 모두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인데, 전기의 정도전, 중기의 이이, 후기의 정약용이 그들이다. 유학자인 동시에 관료였던 이들은 진리 탐구와 현실 참여라는 지식인의 자의식 내지 정체성이 두드러졌다.

이들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인물은 삼봉(三峰) 정도전이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개국했으나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정도전은 지식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여러 상념들을 갖게 한다. 정도전의 삶과 사상을 돌아볼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의 하나는 그가 이름을 지은 조선의 대표 궁궐인 경복궁(景福宮)과 그 경복궁의 대표 건축물인 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이 왜 근정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지의 이유가 <삼봉집>에 나온다.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황폐화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사의 큰 것이겠습니까. (…)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처리하고, 낮에는 어진 이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조령(朝令)을 만들고, 밤에는 몸을 편히 쉰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인군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국왕의 부지런함을 강조함으로써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의 역할을 계몽하고자 했다. 비록 권력투쟁에 의해 좌절됐지만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왕조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됐으며, 그가 제시한 정치·경제·문화의 개혁 원리는 조선사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

우리가 보는 근정전은 태조 때 정도전이 주도해 지은 게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고종 때 대원군이 주도해 중건한 것이다.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내가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새롭게 가다듬어 완성시킨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근정전의 구조는 앞면 5칸과 옆면 5칸으로 이뤄진 2층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와 계단 주변 난간기둥에는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고,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의 양편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다.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면 뒤편 중앙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을 놓았고, 그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 경복궁의 대표 건축물로서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국보 223호인 이 근정전 앞에 서게 되면 도성을 설계하고 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의 삶과 사상을 자연 회고하게 된다. 정도전의 꿈과 이상은 한마디로 성리학에 기반한 일관된 개혁의 구현에 있었다. 그것은 재상을 중심으로 권력과 직분이 분화한 합리적 관료 지배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그 통치권이 백성들의 삶을 위해 행사돼야 한다는 민본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개국공신 정도전의 초상. | 경향자료 사진

조선시대 개국공신 정도전의 초상. | 경향자료 사진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정도전은 행운의 지식인이었다. 정몽주와 함께 신진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친 정도전은 한때 유배와 유랑이라는 정치적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이성계를 만나 이른바 ‘역성혁명’을 주도하고 또 성공했다. 정도전의 기획은, 특히 그의 재상제는 정치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재상권 강화를 주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왕조의 정치를 군주 중심으로 할 것인가 재상 중심으로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왕권과 신권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할 것인가는 전통사회 정치의 최대 이슈였다. 이 대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당쟁 과정에서 다시 반복됐으며, 그 결과 군주와 관료 사이의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에는 비극적 결말이 배태돼 있었다. 왕권보다 신권을 중시한 그의 정치관은 왕권 세력에게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주도함으로써 당시 사병을 보유하고 왕권을 대표하던 이방원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았던 두 사람은 권력을 놓고 다시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는데, 그 와중에 정도전은 결국 패배하게 됐다.

지금 여기서 권력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이 갖고 있는 사회개혁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비록 유교적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 하더라도 정도전은 진리와 정치의 궁극적 목표가 백성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 놓여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토지문제를 중심으로 한 대내정책과 대명 외교를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 모두에서 일관된 개혁노선을 추구했고, 결국 왕조 교체라는 일대 혁신에까지 나아갔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지식인이란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유교적 지식인과 현대적 지식인을 그들이 놓인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지나간 시대 지식인들과 비교할 때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 지식인에게 부여된 본분이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하는 막간에 학교에서 가까운 경복궁을 찾았다. 모처럼 근정전 앞에 서서 정도전의 꿈을 떠올리니 마음이 착잡했다. 지식의 중요성이 강화되는 지식정보사회의 만개 속에서 갈수록 초라해지는 우리 시대 지식인의 초상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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