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옥희는 ‘최초’ ‘최다’의 전설이었다

2013.07.23

골프의 전설은 자신의 열정을 천상의 무대로 옮겼다.

한국 여자골프의 큰 별 구옥희가 자신의 골프 열정을 천상의 그린으로 옮겼다. 향년 57세. 1978년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골퍼가 된 그는 통산 44승(국내 20승·해외 24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믿었던 그의 평생은 도전으로 채워졌고 늘 ‘최초’, ‘최다’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골프에 인생을 바쳤던 그는 ‘최후’까지도 골프와 함께 한 진정한 프로였다.

지난해 4월 열렸던 롯데마트여자오픈에서 구옥희가 샷을 날리고 있다. KLPGA제공

지난해 4월 열렸던 롯데마트여자오픈에서 구옥희가 샷을 날리고 있다. KLPGA제공

구옥희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004년 말.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한창 활동하던 때였다. 그는 인터뷰가 가장 어렵다는 평가를 듣는 선수였다. 질문에 아주 짧게 대답하거나 미소로 대충 때우고 마는 일이 많아서라고 했다. “말 재주는 타고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던 그의 첫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그러나 그는 필드에서만큼은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없는 선수였다. 1978년 5월 경기도 양주의 로얄골프장에서 처음 열린 여자 프로테스트를 통과해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가 됐고, 1979년 쾌남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한국 여자골프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1980년에는 5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전무후무한 전승 기록을 작성하는 등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20승을 거뒀다.

1983년에는 일본 투어로 진출해 통산 23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경기 중 불리한 판정을 받았고 김치 냄새가 난다는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실력으로 모든 장벽을 넘어섰다. 그는 “골프를 처음 배웠을 때는 물론이고 도전을 할 때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자기 최면이 있었기에 심한 차별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1988년 3월에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 터콰이즈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한국인 LPGA 투어 우승자 1호로 기록됐다. 그 우승은 바로 2011년 10월 한국(계)선수의 LPGA 투어 ‘100승 합작’의 주춧돌이었다.

그의 이름에는 늘 ‘최초’, ‘최다’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개인 통산 44승(국내 20승·해외 24승), 한국 투어에서 한 시즌 전승 기록을 세웠고, 한·미·일 3개국 투어 제패, 7개 대회 연속 우승(1979년 10월~1981년 6월), KLPGA 명예의 전당 헌액 1호(2004년), KLPGA 최고령 우승(45세·2002년 마주앙 여자오픈) 등 그는 항상 ‘넘버 1’이었다.

허약한 체력을 자기 관리로 극복
그러나 그는 타고난 운동선수는 아니었다. 162㎝의 평범한 체격에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체력이 약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 투포환 선수로, 고등학교 시절에는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동했지만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몸이 약하지 않았다면 계속 육상을 했을 것이다. 골프를 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신력은 누구보다 강했다. 1975년 경기도 고양의 123골프장에서 캐디로 골프를 시작한 그는 일과를 마친 뒤 24박스의 공을 쳤다. 그는 남들과 똑같은 노력은 노력이 아니라고 여긴 사람이었다. 예정된 연습을 마친 뒤 이어지는 연습이 진짜 연습이고 노력이라고 여겼다. 1970년 말 남서울골프장에서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한장상 고문(73)은 “구옥희는 다섯 개를 하라고 하면 늘 열 개를 해냈다. 남자보다도 더 많은 훈련을 해낸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기 관리에 있어 타고난 프로였다. 1990년대 초반 미국 무대에서 활동했을 당시 참선(단전호흡)을 접하고는 평생 잠자리 들기 전 1시간 동안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몸 관리를 위해 육류나 튀김은 물론 인스턴트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선수생활을 위해 결혼까지도 포기했다. 골프와 함께 한 38년은 그에겐 도를 닦는 과정의 연속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런 노력의 산물이 2005년 6월 19일, 마흔아홉에 들어올린 JLPGA 투어 서클K 선크스 레이디스오픈의 우승컵이었다.

그러나 규칙적인 참선도 흐르는 세월의 바이오리듬은 바꿀 수 없었다. 2007년을 끝으로 JLPGA 투어 카드를 완전히 잃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아카데미를 준비했다. 2009년에는 시니어 투어 활성화를 위해 다시 코스에 서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늘 정규 투어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2010년 다시 골프화 끈을 조여맸다. “35세가 되던 해부터 5년 주기로 은퇴를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왔다”며 “손주뻘 선수들과 경쟁하는 것이 때로는 창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오래 투어에 남는다는 자부심이 더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11년 3월 구옥희가 KLPGA 협회장에 선출된 후 협회기를 흔들고 있다. KLPGA제공

2011년 3월 구옥희가 KLPGA 협회장에 선출된 후 협회기를 흔들고 있다. KLPGA제공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었던 골프 열정
그는 2011년 4월 KLPGA 투어 11대 회장에 선출되며 또 한 번 화제를 뿌렸다. 하지만 절차상의 문제로 선출이 무효화됐고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한장상 고문은 “본인의 뜻보다는 주위의 뜻에 등 떠밀려 나간 선거였다”며 “결과적으로 망신살이 뻗친 셈이 됐고, 그 일 이후 많이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투어 생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거의 모든 대회에서 예선 탈락하면서도 “한 번 더 우승하고 멋진 은퇴를 하고 싶다. 후배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더 젊어지는 느낌”이라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됐다. 지난 겨울 동계훈련을 떠나기 전까지 안부를 주고 받았지만 시즌 개막을 앞둔 지난 4월 초 돌연 일본으로 출국한 뒤 연락이 끊겼다. 얼마 뒤 자신을 어려워하는 후배들과 겨뤄보야 성적도 좋지 않은데 대회에 왜 나오냐는 불편한 시선을 뒤늦게 알게 돼 충격을 받고 떠났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석 달 뒤인 7월 11일. 갑작스러운 비보가 날아들었다. 일본 시즈오카현의 한 골프장에서 생활하면서 필드로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골프의 전설은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평소 저혈압 증세가 있었고, 생의 마지막 날 몸이 좋지 않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고 한다.

KLPGA는 15일 국내로 시신을 운구해온 뒤 협회장으로 골프 전설의 마지막을 배웅하기로 했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의 오늘이 있게 한 골프 전설을 향한 애도의 분위기는 뜨겁기만 하다. 골프계 한 관계자는 “구옥희는 골프밖에 몰랐고 골프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러나 생전 영웅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골프의 전설은 자신의 열정을 천상의 무대로 옮겼다. “필드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던 골프의 전설은 이미 천상에서 자신의 전부였던 골프를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 특유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그는 멋지게 은퇴하고 싶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불태웠던 골프에 대한 열정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진정 멋있는 골퍼였다.

이지연 중앙일보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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