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 눈높이, 현실을 직시하라

2013.06.25

얼마 전 대학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해왔다. “우리 딸내미가 국제학교에서 전교 3등을 했다!” 친구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축하해. 네 딸이 아빠를 닮아 영재로구나.” 이렇게 덕담을 건넸다. 부모에게 공부 잘하는 자녀는 언제나 최고의 훈장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우리 아이는 영재가 아닐까’라는 상상에 빠져보곤 할 것이다. 아이가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심리일 테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영재는 평균 이상의 지적 능력과 수준 높은 창의력, 강한 과제 집착력의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세계적인 영재 권위자인 렌쥴리(Joseph S. Renzulli)의 세 고리 이론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모두 뛰어나면 좋지만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적어도 한 특성이 상위 2% 이내에 들고, 나머지 특성에서 상위 15% 이내에 들면 영재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각 교육청과 각 학교의 영재교육원에서 5만5000여명(2011년 현재)이 영재로 뽑혀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영재들도 명문대에 합격하려면 최소 5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6월 말쯤 수시원서를 쓸 때까지도 부모와 학생의 ‘눈높이’는 쉽게 낮아지질 않는다. | 일러스트·만화그리는 목각인형

6월 말쯤 수시원서를 쓸 때까지도 부모와 학생의 ‘눈높이’는 쉽게 낮아지질 않는다. | 일러스트·만화그리는 목각인형

올해 수능을 보는 학생은 65만명 정도(6월 4일 모의고사 응시자 64만5960명 기준)로 추정된다. 그런데 소위 ‘간판’ 좋은 대학으로 불리는 ‘SKY+카이스트+포스텍’은 다 합해봐야 1만명 정도다. 전국에 일반계고교는 1500개 정도다. 외고나 과고를 포함한 특목고와 자사고가 118개에 3만1000명 정도다. 여기에 일반계 고등학교 전교 10등까지만 더하면 4만6000명 정도가 소위 간판 좋은 대학교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여기를 기준으로 해도 4대 1이 훨씬 넘는다.

2014년 대입 수시원서 시즌이 돌아오고 있다. 고3 수험생을 둔 부모나 학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입시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6월 말쯤 수시원서를 쓸 때까지도 부모와 학생의 ‘눈높이’는 쉽게 낮아지질 않는다. 대부분 어릴 때부터 영재학급이나 영재교육원에서 한두 번쯤 뽑힌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우리 아이가 영재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나 대학입시의 현실은 냉혹하다. 아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영재였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예전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면 더더욱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칫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수시원서를 쓸 경우 부모나 자녀 모두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 주위에도 큰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 수시원서를 쓸 때 경희대 한의대를 밀어붙였지만 낙방했다. 또 미련이 남아 정시에서도 이 학교 한의대를 썼는데 또 낙방이었다. 딸보다 어머니가 더 낙심했다. 결국 딸은 재수를 했고 어머니가 원하던 한의대는 가지 못했다.

이진여씨(가명)는 초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하고 공부를 잘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가서도 웬만큼 하긴 했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씨와 그 어머니는 딸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시원서를 쓸 때 엄마의 기대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이씨는 성적이 안 되어 써봤자 떨어진다는 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화여대, 서강대에 원서를 냈다. 교사는 숙명여대 정도를 쓰면 합격할 수 있다고 조언했는데도 이씨의 자존심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씨는 “당시에는 ‘내가 그래도 예전엔 영재였는데’라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는 담임의 예상대로 두 대학에 모두 떨어졌다. 이씨는 재수를 해서 수도권 소재 대학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참담한 결과였다.

정보민씨(가명)는 고3 때 내신 성적이 2∼3등급. 반에서 6~7등 정도였다. 담임이 모 여대를 쓰라고 하자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나를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런 델 쓰라고 해요?” 하면서 말이다. 담임이 하도 우겨 비슷한 수준으로 세 곳을 썼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모두 다 떨어졌다. 결국 정씨는 스튜어디스로 꿈을 바꾸었고 인하전문대 항공운항과에 합격했다.

심수정씨(가명)도 비슷한 경우다. 중학교 때 전교 3등으로 졸업했고 고교에 진학해서도 고1 내신이 전교 6등이었다. 하지만 고2 때부터는 성적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심씨는 “원래 잘했으니까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노력을 안 했다”고 토로한다. 중학교 공부와 달리 고등학교 공부는 노력하는 사람이 이긴다. 고등학교 공부는 그야말로 범위도 많고 자기주도학습이 되지 않으면 점수가 잘 나올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초등학교 때 잘 나가던 기억이나 중학교 때의 승승장구를 못 잊고 슬럼프에 빠진다. 특히 특목고를 썼다 떨어진 학생들은 그 증상이 훨씬 심하다고 일선 교사들은 지적한다. 이런 학생들일수록 일반계 고등학교를 무시하곤 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특목고로 빠진 상태여서 일반계 고교에서는 적당히 공부해도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는 것이다. 중학교 때 성적만 믿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심씨는 올해 수도권 소재 대학의 생명공학부에 합격했는데 MT를 갔다가 학생들의 ‘수준’을 보고 도저히 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심씨는 현재 ‘반수’(대학에 입학한 후 1학기만 마치고 여름방학부터 본격적인 수험생활에 뛰어드는 재수방식)를 할 결심을 굳혔다.

요즘 대학입시는 수시 비중이 커 정시(내신 비중은 거의 없고 대부분 수능성적으로 뽑는데 정원의 20~30%에 불과하다)로는 국, 영, 수 모두 2등급을 받아도 겨우 ‘인서울’인 실정이다. 하지만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들은 고2까지는 ‘서울 10개 대학’ 아니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수능이 끝나면 이상과 현실의 냉혹한 ‘갭’을 깨닫는다. 일반고 학생들은 내신 따기는 유리하지만 상위권 대학마다 있는 최저등급(SKY 경우 국, 영, 수 모두 1등급)을 못 채워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목고 학생들은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을 수 있지만 정원의 70% 이상 뽑는 수시전형은 내신이 안 나와서 힘들다. 정시로 가려면 수능이 거의 ‘올백’이 나와야 SKY를 갈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대한민국 모든 수험생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눈높이는 현실에 맞추려고 하질 않는다. 그러다 공부 좀 한다는 학생은 대부분 재수나 반수, 심지어 삼수를 한다. 그 비용에 또 부모는 허리가 휜다.

홍콩의 유명가수 광미운은 미인대회서 3위를 했다. 그는 인터뷰 때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않은데 혹시 머리가 나쁜 거 아닙니까?” 이에 광미운은 재치 있는 대답을 했다. “학교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졸업 후에 무슨 일을 하죠? 엔지니어, 법률가, 의사, 이런 정도 아닙니까? 하지만 그다지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은 뭘 하죠? 이들을 거느린 회사의 주인이 되지 않았나요?” 통쾌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학부모나 학생들은 언제쯤 광미운과 같은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을까. 광미운 같은 당당함만 있다면 공부를 좀 못해도 누구든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입시는 모두를 ‘패자’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현행 입시제도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부모와 학생 모두를 닦달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심지어 영재들이 더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까지 한다. 또 대학입시가 끝나도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한 99%가 넘는 대부분 부모와 학생들의 가슴에 큰 ‘멍울’을 남긴다. 언제까지 이런 ‘굿판’에 온 국민들이 시달려야 하는지.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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