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재를 품은 에트나의 와인들

2012.10.30

에트나는 분화를 통해 인간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여 풍요로운 농산물과 와인을 선물했다.

시칠리아 남동부 해안에 있는 시라쿠사는 아그리젠토, 젤라와 함께 기원전 8세기에 세워진 그리스 도시국가로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또 다른 헬레니즘 문화의 꽃이다. 아폴로신전, 그리스극장 등 풍부한 유적을 가지고 있으며, 일찍이 키케로가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그리스 도시”라고 칭송했다.

몬테 세라에서 바라본 베난티 와이너리. 앞쪽 포도나무가 필록세라 해를 입지 않은 성골 포도나무다.

몬테 세라에서 바라본 베난티 와이너리. 앞쪽 포도나무가 필록세라 해를 입지 않은 성골 포도나무다.

화산재 덕분에 필록세라 피해 없어
필자는 아침 일찍 시라쿠사의 구시가에 있는 바로크풍의 아름다운 두우모를 감상하고, 그리스 고대도시 타오르미나로 가기 전에 북쪽 에트나 화산을 향해 출발했다. 하룻동안에 에트나 화산 기슭에 있는 유명한 베난티와 테누다 테레네라 와이너리를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난티 와이너리는 미국의 저명한 와인잡지 에 의해 2012년 올해의 와인으로, 2007년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와인과 요리 전문지 <감베로 로소>(Gambero Rosso)에 의해 그 해의 와인으로 선정되었다. 테레네라 와이너리는 와인 작가 휴 존슨이 죽기 전에 마셔봐야 할 와인 중에 하나로 꼽은 와이너리다.

A18 고속도로와 SP8 지방도로를 따라 비아그란데로 향했다. 아직도 흰 연기를 내뿜으며 활동 중인 유럽 최고 해발 3328m의 활화산인 에트나의 장엄한 모습이 눈앞에 다가왔다. 에트나 화산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풍광이 연록색을 띠어 더욱 풍요롭게 느껴졌다. 실제로 아프리카에 가까운 시칠리아 섬 서쪽보다는 그리스나 이탈리아 본토에 가까운 동쪽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더 높다고 한다. 베난티 와이너리는 카타니아에서 약 20㎞ 떨어진 에트나 화산 언덕배기 아름다운 비아그란데 마을에 있다. 1800년대에 세워진 오랜 전통의 와이너리다. 와이너리를 찾는 데 30분 이상을 헤맸다. 정문에는 여느 집처럼 조그마한 간판과 번지수가 전부였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회색빛 건물에 들어섰다.

먼저 베난티 와이너리의 뒷동산에 해당된 몬테 세라 포도밭을 방문했다. 포도밭은 에트나 산의 남쪽 이오니아해를 바라보는 경사지에 있다. 초입에 있는 감나무 두 그루가 정겨웠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건너온 필록세라(Phylloxera·포도나무 뿌리를 갉아먹는 진딧물)가 창궐하여 유럽 대부분의 포도원이 황폐화할 때도 이곳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뜨거운 지중해의 날씨와 강한 화산재 성분의 부드러운 토양으로 2m까지 뿌리가 내려 이곳 포도나무에는 필록세라가 기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근대 와인산업에서 재앙에 가까운 필록세라 문제는 필록세라에 강한 미국의 포도품종 뿌리에 유럽의 포도나무 줄기를 접목시켜 해결했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포도나무는 진골(眞骨)이고, 이곳 에트나나 칠레와 같이 해를 입지 않은 포도나무를 성골(聖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셀라도어에서 테이스팅한 베난티 와인과 수출담당 이사 파일라.

셀라도어에서 테이스팅한 베난티 와인과 수출담당 이사 파일라.

다른 품종 접목하지 않은 순수혈통
그런 의미에서 이곳 에트나 화산의 와인은 포도 품종의 특질을 나타내는 순수한 혈통의 와인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도 이곳의 포도나무는 유럽이나 미국처럼 다른 품종을 접목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땅 위에 칡넝쿨처럼 뻗은 어미 줄기에서 새로운 새끼 포도나무가 자란다. 포도나무의 수령은 보통 80세다. 100세가 넘은 포도나무에서 건강하게 익어가고 있는 포도송이를 보면 새삼 와인산업에서 테루아르(토양)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100년이 넘은 그루터기 주름살이 마치 우리 인간의 인생역정이 반영된 것처럼 느껴지고, 와인도 그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부속 와인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200년이 넘은 고색 창연한 셀라도어(시음 공간을 마련해 놓은 포도주 저장고)에서 간단한 식사와 함께 준비된 총 9종의 와인을 시음했다.

가장 인상적인 와인은 피에트라마리아(Pietramaria)와 세라 델라 콘테사(Serra della Contessa)였다. 피에트라마리아 화이트 와인은 100% 카리칸테(Carricante)로 만들었다. 에트나 동쪽 기슭 해발 950m에 있는 밀로 포도밭에서 재배된 것이다. 피에트라마리아 화이트 와인은 오렌지 향과 열대과일 아로마, 미네랄의 풍미를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매혹적인 와인이었다. 일반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과는 달리 오래 저장하면 더욱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세라 델라 콘테사는 80%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acalese)와 20% 네렐로 카푸치오(Nerello Cappuccio)를 배합하여 만든 레드 와인이다. 포도는 바로 베난티 와이너리 뒷산 해발 450∼500m에 위치한 몬테세라에서 재배한다. 아름다운 루비 색에 붉은 과일과 올리브 향, 연기 냄새와 스파이시한 풍미에 부드러운 타닌과 우아한 뒤끝이 일품이다. 인간이 느끼는 와인의 맛은 와인의 속성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특성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성의 상호작용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와인들에서 에트나 화산재의 잔향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마치 백악질 토양의 샴페인에서 하얀 거품의 향미를 상기하듯이 와인은 분명 자기가 자란 테루아르(토양)의 모든 것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00년의 흔적이 새겨진 베난티 포도나무. 구루터기 아래가 에트나 화산의 화산석이다.

100년의 흔적이 새겨진 베난티 포도나무. 구루터기 아래가 에트나 화산의 화산석이다.

유럽 가장 높은 해발 950m의 포도밭
베난티 방문을 마친 필자는 에트나 화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테레네라 와이너리를 향해 산악도로를 따라 달렸다.

테레네라 와이너리는 와인에 특별한 열정을 가진 농업경제학자인 마르코 그라지아에 의해 2002년 설립됐다. 그는 에트나 지역 와인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다. 이곳의 포도원 역시 에트나 화산의 영향으로 모래와 화산암이 섞인 검은 화산질 토양이다. 그래서 와이너리 이름도 ‘검은 대지’라고 했다. 다른 에트나 지역처럼 네렐로 카프치오와 네렐로 마스칼레제를 배합하여 레드 와인을 생산하고, 카리칸테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셀라에서 산로렌초(San Lorenzo) 2011과 산토 스피리토(Santo Spirito) 2010년 빈티지를 맛보았다. 이곳 포도밭은 에트나 화산 북쪽 기슭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해발 950m에 있어, 기온이 서늘하고 일교차가 크다. 따라서 와인 스타일도 버간디의 피노누아(Pinot Noir)나 피에몬테의 네비올라(Nebbiolo)와 같이 부드럽고 우아했다.

테레네라 포도원에서 멀리 에트나 화산의 흰 연기를 바라보니 해가 저물기 전에 문득 신비스러운 에트나 화산에 가보고 싶었다. 에트나 화산의 등정은 링구아글로사를 거쳐 피아노 프리벤차의 북사면과 니콜로시를 거쳐 리푸조 사피엔자의 남사면으로 가는 두 길이 있는데, 자동차로 해발 2000m까지 접근할 수 있다. 보다 장엄한 풍경과 최근에 분화한 용암을 보기 위해 북사면 길을 택했다. 정상을 향해 무성한 숲길을 따라 약 1시간을 달리니 기이한 검은 벌판이 갑자기 눈앞에 전개됐다. 마치 홍수가 할퀴고 간 흔적처럼, 뜨거운 용암에 껍질이 타버린 하얀 나목들이 검은 용암 위에 여기 저기 뒹굴어 있고, 한편에서는 이름 모를 작은 식물들이 막 태어나고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에트나 화산은 기원전 4세기께부터 1983년까지 90여 차례나 분화하고도 아직도 그 위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에트나는 분화를 통해 인간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여 풍요로운 농산물과 와인을 선물했다.

글·사진 | 송점종<우리자산관리 대표, Wine MBA>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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