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미소 속에 숨은 고통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2011.11.01

알록달록한 무늬의 파자마를 입은 여성 10여명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관광지 숙박업소나 걸그룹 합숙소가 아니다. 10월 16일 서울 상암동 홈플러스 월드컵공원점 앞 노상.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이 ‘Occupy 대형마트’ 플래시몹을 벌이는 모습이다. 이들은 홈플러스 안도 점령(?), 쇼핑하고,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이들이 파자마를 입고 대형마트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보단 쉽고 분명하다. 24시간 영업시간 규제, 휴일영업 금지를 요구했다. 이들이 내건 모토는 ‘밤에는 수면을! 휴일에는 휴식을!!’.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의 ‘Occupy 대형마트’ 플래시몹 장면. /서성일 기자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의 ‘Occupy 대형마트’ 플래시몹 장면. /서성일 기자

심야영업을 하는 대형마트는 건강 파괴지역이다. 여성환경연대는 “야간 근무자는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평균수명이 10년 이상 낮다”고 밝혔다. 교대근무(심야노동)의 또다른 이름은? 발암물질이다. 은유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2007년 심야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생명을 담보로 노동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대자본으로 구멍가게와 재래시장을 잠식한 대형마트는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노동자를 골병 들게 한다. 유통업체 계산원과 판매원들은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고통은 다음과 같다.

대전의 한 대형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ㄱ씨(31·여)는 작년 여름 병원에서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았다. 하지정맥류는 다리의 근육이 꼬이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혈관 기형 질병. 주로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서 있는 경우 생긴다. 마트에서 3년째 일하는 ㄱ씨는 그동안 실제로 평일 9시간, 주말에는 11시간 동안 서서 일했다. 의사는 "절대 다리를 혹사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대안이 없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대에서 일하는 ㄴ씨(23·여) 역시 매일 같은 자리에서 서서 일한다. 사규에 반드시 서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손님을 왕으로 모셔야 하는 서비스업의 특성상 잠시라도 의자에 앉을 수는 없다. 그는 “회사에서 서비스를 워낙 중시하니까 앉는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경향신문 2008년 1월 16일자, 집중기획-서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 / 하루 8~11시간 ‘고문’…머리끝까지 ‘골병’)

경향신문 보도 이후 노동부는 ‘서서 일하는 근로자 건강보호대책’을 발표했다. 백화점·할인마트 등의 사업장에 종업원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비치되도록 행정지도·감독을 강화하기로 했다. 계산대에 의자를 갖다 놓는 사업장도 늘었다. 노동조건은 나아졌을까. 1년 뒤 보도 내용이다.


2011년 4월 11일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 계산원이 접이식 의자를 한쪽에 둔 채 일어서서 물건 값을 계산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2011년 4월 11일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 계산원이 접이식 의자를 한쪽에 둔 채 일어서서 물건 값을 계산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매장에 의자가 비치되어 있어도 앉아서 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민정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여성부장은 “지난주 제주에 있는 ㄹ마트 매장을 3일간 모니터링한 결과 의자가 있는데도 대다수 여성 근로자가 서서 근무하고 있었다”며 “사업주의 인식 변화와 노동부의 관리·감독이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경향신문 2009년 2월 16일자, 대형마트 계산대, 아직은 ‘눈치 보이는 빈 의자’)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3년이 지난 후 실태를 점검한 올 4월 11월자 기사 제목은 ‘손님 눈치에 상사 눈치, 전시품 된 계산원 의자’다.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선 계산대 22곳 중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5곳에서만 계산원이 의자를 놓고 일하고 있었다. 계산원 ㄱ씨는 “의자는 창고에 다 가져다놓은 것으로 안다. 너무 바빠서 앉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의자가 있어도 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계산원 ㄴ씨는 “의자가 있어도 관리직 눈치가 보이고 손님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앉기가 힘들다. 다리가 퉁퉁 붓지만 이제는 좀 적응이 됐다”고 했다.

기업형슈퍼마켓(SSM)은 더 열악했다. 경향신문 취재진이 SSM 점포 12곳을 돌아본 결과 등받이 의자를 둔 곳은 2곳에 불과했다. 한 점원은 “손님들이 싫어한다며 사장님이 치웠다”고 말했다. 한국의 자본은 냉정하고, 한국의 행정은 무력하다. 그리고 한국의 법은 있으나마나 하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은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경우에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형마트 노동자들은 감정노동에도 시달린다. 한국일보가 올 3월 보도한 ‘감정노동자들의 비애’란 제목의 기획기사 구절이다.
 

“야 이 XX야, 이 곰팡이 안 보여?” 지난주 서울의 한 대형마트. 30대 남성이 떡국용 떡에 곰팡이가 생겼다며 욕설과 함께 떡 봉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40대 여성 판매원 A씨는 조심스럽게 “고객님, 떡을 냉장고에 보관하셨죠?”라고 물었다. 남성은 “겨울이라 밖에 뒀는데, 뭐가 문제냐”고 받았다. 날짜를 따져보니 열흘 이상 떡을 상온에 방치한 것이다. A씨는 화가 치밀었지만 자세를 가다듬고 환불을 약속했다. (중략)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계산원·판매원, 호텔이나 음식점의 종업원 등 감정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미소 뒤에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통이 숨어 있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미국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처음 정의한 것이다. ‘개인의 기분을 다스려 얼굴 표정이나 신체 표현을 통해 외부에 드러내 보이는 것’을 뜻한다. 2010년 한국에서 번역돼 나온 <감정노동>에서 혹실드는 대가를 받기 위한 행동, 즉 감정노동이 마르크스식으로 상품화될 때 ‘인간소외현상’도 일어난다고 봤다.

그는 책에서 “감정노동을 경쟁과 연결 짓고, 실제적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광고하고, 그런 미소를 만들도록 노동자를 훈련시키고, 노동자들이 미소를 만드는지 감독하고, 이런 활동과 기업의 이익 사이의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정도까지 가려면 아마도 자본주의 방식의 인센티브 체계가 필요할 것”이라고도 했다. 혹실드가 28년 전인 1983년에 한 말이다. 한국은 자본주의 방식의 인센티브 체계는커녕 현행법에 명시된 의자마저 제대로 안 가져다 놓고도 노동자들의 미소를 생산·감독하고, 감정노동과 기업의 이익 사이의 연결고리를 단단하게 묶어냈다. 24시간 영업과 휴일 근무에 새끼 대형마트 SSM까지.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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