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굴복시키지 못하는 ‘수동적 저항’

한윤정 기자
2010.08.24

<먼 그대>와 <채식주의자>

작가 서영은의 단편 <먼 그대>(1983년)에는 매우 특이해서 쉽사리 잊히지 않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문자’라는 이름의 그녀는 허름한 아동출판사의 교정직원이다. 문자는 사십 고개를 바라보는 ‘노처녀’로 행색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소매 끝이 날깃날깃 닳아빠진 외투며, 여름도 겨울도 없이 껑뚱해 보이는 쥐똥색 바지, 보푸라기가 한 켜나 앉은 투박한 양말, 서랍에서 꺼내어 얼찐거릴 때마다 반찬내를 물씬 풍기는 가방’ 등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다. 문자는 출판사의 최고령 직원이면서도 가장 말석이다. 동료들은 문자의 존재만으로도 스스로 모멸감을 느낀다. 

그런 문자의 비밀은 그녀가 한수라는 남자의 ‘첩’이라는 데 있다. 유부남인 한수는 유신시대 여당 소속 국회의원의 비서이던 시절부터 10여년째 문자에게 드나든다. 문자에게 한수는 ‘시렁 위에 걸려 있는 등불’처럼 소중한 존재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털어서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그를 위해 성찬을 차리고, 그의 구두를 보자기에 싸서 방에 들여놓는다. 한수를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편이 기쁨과 행복으로 변한다. 그러나 한수는 문자가 자신에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무디고 비열한 남자다. 그는 ‘돈 없는 주정뱅이가 어쩌다가 값싼 술집을 발견하고도 긴가민가 하여 자꾸 주머니 속의 가진 돈을 헤아려 보듯’ 탐색의 눈초리를 번득인다.

이기적 남자에게 바치는 ‘조건 없는 사랑’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단순한 거부를 통해 수동적 저항이란 새로운 도덕을 제시했다. 그림은 고통스런 인간의 모습을 그린 화가 에곤 실레의 작품.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단순한 거부를 통해 수동적 저항이란 새로운 도덕을 제시했다. 그림은 고통스런 인간의 모습을 그린 화가 에곤 실레의 작품.

한수의 태도는 자신이 모시던 국회의원이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광업소장이라는 힘있는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이어진다. 살림이 풍족해지고 선물과 돈봉투가 넘쳐나는데도 문자에게는 아무 것도 나눠주지 않는다. 한번 주면 계속 요구할까봐 두려워한다. 문자는 한수의 인색과 몰인정에 실망하지만 다시 자신을 담금질한다. 이기적인 남자를 향해 바치는 그녀의 사랑은 ‘짐을 얹고 또 얹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내는 낙타’와 같다.

길지 않아 한수의 몰락이 시작된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와 내각이 해체되면서 정치바람을 타고 앉은 광업소장이란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한수는 모아둔 재산으로 광산업을 벌이지만, 실패를 거듭하고 낙오자가 된다. 주정뱅이가 된 한수는 이제 문자에게 시시때때로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녀를 볼모로 잡아두기 위해 아내를 시켜서 문자가 낳은 딸마저 뺏어간다. 문자는 순순히 아이를 내놓는다. 문자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는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냐고 묻는다. 문자의 답변은 “소유에 대한 집념과 마찬가지로 혈육 역시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며 “그 아이를 데려옴으로써 나 자신을 만족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한수가 요구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모에게 구걸하다시피 빌어서 집으로 돌아온 문자는 문앞에 소변을 보고 술에 취해 방에서 자는 한수를 발견한다. 그는 밥 먹고 가라는 문자의 말을 들은체만체 돈을 뺏다시피 해서 나간다. 문자에게 그런 그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이다.

이런 문자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자는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선택할 법한 쉬운 길을 거부하고, 고집스레 가시밭길을 간다. 돈 많은 홀아비와의 결혼을 권하는 이모의 조언을 물리치는 그녀는 수도와 전기가 갖춰진 도시로 나오라는 제안을 거부하고 더욱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유목민처럼 비타협적이다.  

고행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수도자 같은 문자의 태도에는 으레 기대되는 행동양식을 위반함으로써 부당한 상황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뜻이 숨어있다. 문자는 한수의 걱정과 달리 그에게 아무런 불평과 요구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첩’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위반한다. 엄마로서 그녀는 사랑하는 아이를 순순히 내놓음으로써 아이가 거래와 협상의 대상이 되는 걸 거부한다. 인간 이하로 몰락한 한수를 끝까지 끌어안는 것은 조건적 사랑에 대한 거부로 볼 수 있다. 직장에서의 그녀 역시 세간의 평가기준과 다르게 행동한다. 

문자의 특이함과 관련해 ‘바틀비’라는 고전적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월가 이야기>(1853년)의 주인공이다. 이 단편은 멜빌의 대표작 <백경>을 능가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질 들뢰즈를 비롯해 <제국>을 쓴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정신분석을 정치학과 연결시킨 슬라보예 지젝 등 현대의 유명한 이론가들이 ‘바틀비’의 행동양식에 대해 ‘수동적 저항’이라든가 ‘비실천적 잠재력’이란 용어를 쓰면서 자본주의의 억압적 체제에 대항하는 한편 어떤 언어와 이데올로기로도 포획되지 않는 체제의 간극을 드러내는 철학적, 사회과학적 텍스트로 종종 인용되고 있다.

명백한 규칙에도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
<필경사 바틀비>는 월가의 변호사인 화자가 바틀비란 인물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자신을 나이가 꽤 지긋하며 직업의 성격상 흥미롭고 다소 특이한 집단의 사람들을 제법 깊이 접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화자는 바틀비에 대해 ‘내가 보거나 들은 중에 가장 이상한 필경사’라고 말한다. ‘나’는 ‘부자들의 채권, 저당증서, 부동산 권리증서 등을 쌓아놓고 수지맞는 일을 하는 야심 없는 변호사 중 하나’인데 업무가 증가하자 바틀비란 필경사를 새로 고용한다. 

근대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의 어둠 속에는 수많은 소외가 도사리고 있다.

근대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의 어둠 속에는 수많은 소외가 도사리고 있다.

화자가 처음 본 바틀비는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이 느껴지는 침착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바틀비는 필사에 굶주린 사람처럼 밤낮으로 필사를 한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필경사의 업무는 필사를 하고 그것을 원본과 대조하는 것인데 바틀비는 서류를 대조해보자는 ‘나’의 요청에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리둥절해진 화자는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흥분한다. 그러나 서류 대조를 안하겠다는 바틀비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특이한 것은 바틀비의 거부가 계속되면서 화자는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면서 그런 행동의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바틀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슬려보지만, 바틀비가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면서 거부하는 일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우체국에 들러서 우편물이 와 있는지 봐달라는 부탁도, 옆방의 직원을 불러달라는 부탁도 거부한다.

화자는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먹고 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 우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연민은 곧 고통이고, 고통을 떨쳐버리려면 연민을 버릴 수밖에 없다. 화자는 바틀비를 쫓아내기로 작정하고 그의 개인사를 묻지만, 그는 말하기를 거부한다. 이어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해온 일인 필사조차 거부한 채 유리창 밖으로 빽빽히 들어선 월가 건물의 벽만 바라본다. ‘나’는 바틀비에게 6일 안에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지시하지만 바틀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바틀비에 대한 양가감정을 견디다 못한 ‘나’는 아예 스스로 사무실을 옮겨버린다. 그래도 바틀비는 그 건물의 계단이나 현관에 계속 머문다. 

그러다가 새 입주자의 신고로 마침내 툼즈 구치소라는 부랑자 수용소로 끌려간다. 거기서 바틀비는 먹기를 거부한 채 생을 마감한다. 바틀비의 최후를 지켜본 화자는 그가 워싱턴 D.C.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수취인이 없는 편지의 소각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틀비의 거부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체제를 교란시키는 일이다. 그의 지독한 수동성은 능동적인 비판, 투쟁과는 다르다. 비판과 투쟁이 체제를 인정하는 일인 데 비해 바틀비는 아예 자신을 둘러싼 체제를 무화시킨다. 그는 월급을 받으면 고용주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명백한 규칙에서 비켜 서 있다. 건물의 소유주가 나가라면 나가야 한다는 것, 수용소에서 밥을 주면 먹어야 한다는 일상적 규범 역시 바틀비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는 우연히 끼여든 불순물이며 처리 대상이란 점에서 자신이 취급하던 배달불능 우편물과 같은 처지다. 바틀비는 체제의 얼룩이자 잉여로서 체제의 근간을 흔든다. 그러나 월가의 법칙에 충실한 변호사가 바틀비의 행적에 연민을 느끼고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은 바틀비의 수동성이 갖는 효과를 보여준다. 

이런 바틀비적 저항성이 <먼 그대>의 문자에게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자는 일부일처제의 얼룩이자 잉여로서 자신을 둘러싼 규범을 뛰어넘는다. 

한수는 문자를 지배하는 듯하지만 그녀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문자는 한수의 폭력 앞에 놓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한수를 주눅들게 만든다. 바틀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라면,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로서 같은 방식의 저항이 가능해진다. 바틀비적 여성 인물이 나타나는 또 다른 소설로는 한강의 단편 <채식주의자>(2004년)를 들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영혜라는 여성의 특이한 행동을 남편인 화자의 시선으로 그린다. ‘나’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영혜와 결혼한다. 영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을 한 여자로 화자에게 다가왔고, 결혼 이후에는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무리없이 수행했다.

채식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자연과 평화로의 회귀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채식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자연과 평화로의 회귀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심한 악몽을 꾼 뒤 냉장고의 고기를 모두 버리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런데 채식은 단순히 기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아내는 육식의 악몽을 계속 꾸면서 병자처럼 말라갔고, 남편인 ‘나’의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난다며 잠자리도 거부한다. 겨울나무처럼 바싹 마른 아내는 회사 간부들과의 부부동반 회식자리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나와서 고기가 든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장인·장모를 비롯한 처가 식구들은 아내의 채식에 대해 우려와 수치심을 느낀다. 

어느 날 처형의 집들이가 열리고, 아내가 계속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데 화가 잔뜩 치민 장인은 딸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 이를 거부하던 아내는 칼로 자기 손목을 긋고 병원에 입원한다. 장모가 흑염소를 고아 오지만 아내는 그것을 창밖으로 던진다. 화자가 잠깐 잠든 사이에 아내가 사라진다. 거리가 어수선해서 나가보자 웃통을 벗은 아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벤치에 앉아 있다.

화자의 관점과 교차되는 영혜의 악몽은 육식으로 상징되는 이 세계의 폭력을 묘사한다. 천장에 걸린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고기를 썰다가 부러진 칼날이 입안에서 발견된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해당하는 느낌,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어릴 때 집에서 키우던 개를 오토바이에 달아매 끌고다니면서 죽인 뒤 먹던 아버지, 고기 반찬을 재촉하면서 짜증을 부리는 남편, 그리고 이런 장면들 앞에서 어쩔 줄 모른 채 울고 있는 여자….    

요컨대 영혜에게 육식은 폭력과 살상이 난무하는 남성적 세계의 상징이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며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던 영혜는 우연한 꿈을 계기로 채식주의자가 되며, 나아가 스스로 인간이 아닌 나무로 변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끝내 정신병원에 갇힘으로써 바틀비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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