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화 상대 반론보도소송 이긴 정청래 전 의원

2008.08.26

거대 언론과 싸워 승리한 독한 정치인

정청래 전 민주당 의원이 거대 언론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를 상대로 낸 반론보도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8월 13일 “조선일보는 이 판결이 송달된 후 7일 이내에 조선일보 A10면 상단 부분에 별지 기재 반론보도문을 게재하되, 제목은 고딕체 50급 활자로, 본문은 본문 활자로 게재하라”라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또 “만일 조선일보가 이 기간 안에 반론보도문 게재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신청인에게 기간 만료일 다음 날부터 의무 이행일까지 매일 각 100만 원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라고 덧붙였다.

판결의 요지는 사회면에 50급 크기의 큰 활자로 제목을 달고 반론보도문을 싣지 않을 경우 실을 때까지 매일 100만 원을 계산해주라는 것이다.

‘고딕체 50급 제목 크기’ 판결 이례적
이 판결은 50급 활자 크기 제목으로 반론보도문이 신문에 실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에 언론사적으로도 매우 주목되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제목의 반론보도문을 실은 신문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 판결에 대해 조선일보의 대응이 주목된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 조선·문화일보 보도가 한나라당 후보 측이 동원한 ‘가짜 학부모’의 진술에 기초한 것이 확인됨에 따라 이들 신문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검찰도 “18대 총선 때 정청래 민주당 후보(서울 마포 을)가 지역 초등학교 교감에게 ‘교감과 교장을 자르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다 모가지 잘리는 수가 있어’라는 등 폭언을 했다는 문화일보 등의 보도는 ‘가짜 학부모’의 거짓 증언에 따른 것으로 수사 결과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이번 판결은 정 전 의원이 거대 권력인 언론에 대항해서 고집스럽게 싸운 결과물의 하나다. 현역의원이었던 정 후보는 ‘모가지 발언’ 등의 보도로 역풍이 일면서 강용석 후보에게 6000여 표 차이로 낙선했다. 정 전 의원은 낙선 후 문화일보 등을 대상으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으며, 문화일보에 제보한 한나라당 구의원과 가짜 학부모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했다. 특히 한나라당 구의원에 대해서는 재산가압류 신청을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정 전 의원은 “문화·조선일보 등에 형상·민사손해배상소송, 반론 및 정정보도청구 소송 등 현재까지 소송 건수만 무려 13건에 달한다”고 밝혔다. 또 손해배상청구액만도 17억 원(문화일보 7억 원, 조선일보 5억 원, 한나라당 구의원 5억 원 등)에 이른다.

그는 이런 언론사와 싸움에 대해 “이미 지난 총선 기간의 보도는 허위로 밝혀졌다”면서 “(낙선까지 한 마당에) 오히려 지금 조선·문화일보와 싸움은 내가 유리한 갑(甲)의 위치에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난 총선에서 유독 조선일보와 문화일보가 그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조선일보의 경우는 그가 참여정부 초기 국회 문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4대 개혁 입법’ 중 하나인 신문법을 대표 발의한 것이 요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당시 신문법은 유가부수, 매출액 등 경영자료를 신문발전위에 제출하도록 돼 있다. 그동안 비공개였던 경영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 조선일보가 달가울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또한 문화일보에 대해 2006년 국정감사에서 제기한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선정성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문화일보가 그에 대한 반감으로 지난 총선에서도 의도성을 갖고 기사를 작성했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다.

정 전 의원의 이 같은 전투적 기질은 어디서 나왔을까. 196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된 어머니가 마흔다섯에 난 열 번째 막내아들로 다른 시골 아이들처럼 자랐다. 그러나 1985년 건국대에 입학 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접하면서 운동권으로 변모했다. 특히 건대 신문사 기자이던 1986년 건국대사건을 지켜보면서 왜곡된 사실을 보도하는 제도권 언론에 맞서 건대신문 호외를 만들면서 학생운동의 선봉대로 나섰다. 건대 사건은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건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으로 학생 398명이 구속기소됐다

보안법 폐지·신문법 개정 주도
그는 건대 사건을 계기로 학생기자 직을 그만두고 지하학생운동조직에 들어갔다. 특히 1988년에는 최일선에서 학생운동을 지도해 수배 생활을 겪다가 구속됐다. 그는 수배를 피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안경을 끼고 삭발의 흔적을 감추고자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교내 프락치의 제보로 후배 자취방에서 체포됐다. 1989년에는 미국 대사관저에 들어가 1시간 동안 ‘농수산물 수입개방을 결사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다 붙잡히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는 다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이후 노사모 활동을 했으며, 친노 외곽 단체이던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초대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열린우리당 외곽 단체인 ‘국참연’ 멤버로 활동했으며, 특히 17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과 신문법 개정을 주도했다. 의정 활동기간 4년 내내 국회 문화관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문화일보 등 보수 신문들의 기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는 당 안팎에서 경계대상 인물이기도 했다. 초선 의원으로서 ‘건방지다’는 말을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자주 들었으며,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그에게 비호감을 갖는 의원이 적지 않았다. 특히 2006년 당의장 선거에서 정동영 캠프의 대변인으로서 상대 후보이자 정치 대선배인 김근태 후보를 거세게 공격해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는 최근 KBS·MBC 등 공영방송 사수 활동의 일환으로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개최하는 촛불문화제에 참가하고 있다. 그는 KBS 정연주 사장의 체포에 대해 “예전에 쿠데타를 하면 가장 먼저 방송국을 장악했다”면서 “지금 KBS 사태는 군사 쿠데타와 같은 양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촛불문화제 현장에서 강제 진압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비롯해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 등을 폭행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고소하기로 했다.

그는 “당분간 이명박 정부의 언론 탄압에 맞서 법정 투쟁 등에 전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4년 후 총선에 다시 도전해 마포 주민들의 심판을 받을 예정이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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