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죽음, 유령의 죽음

2008.05.13

[이명원의 눈]지식인의 죽음, 유령의 죽음

더욱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시간강사들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 은폐되어 있는 또 다른 ‘88만 원 세대’로, 삶의 정황은 사실상 고학력 실업자와 유사하다.

학계의 서구 콤플렉스를 일컫는 조어로 ‘기지촌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한동안 인구에 회자된 바 있다. 철학자 김영민 교수는 이 용어를 통해, 자생적 학문이 부재한 상황에서 끝없는 서구 추종과 모방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우리 학계의 기묘한 풍토를 근원적으로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인문학계의 구조적 위기의 한 근거로 ‘논문중심주의’를 거론하기도 했다. 한국의 인문학이 생동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 기능을 상실하고 기능적 지식 생산에 골몰한 결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희석된 것은 물론 인문학의 활력 역시 휘발되었다는 주장이다.

문제 제기가 있다면 처방도 따라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식인 사회의 거점인 대학의 상황을 보면 병통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대학 사회에도 이른바 ‘국제 경쟁력’이라는 구호가 팽배하면서, 오늘의 대학교수들은 ‘논문 쓰기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신규 교원 임용에서는 미국 대학 출신의 ‘유학파’가 다수를 차지한다. 논문 평가에서도 SCI급의 국제 학술지를 정점으로, 국내 등재학술지, 국내 등재후보학술지, 국내 기타학술지 등의 위계구조를 설정해 연구 업적에 대한 ‘양적 평가’를 획일화했다.

동시에 대학의 시장화도 가속화하여 지식인 본연의 순수 학술 연구보다 정책 연구를 선호하고, 산학협력이라는 명분 아래, 마치 영업사원처럼 연구비 수주액수가 교원 평가의 주요한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교원의 신분은 아주 취약해졌다. ‘계약제’의 전면적인 도입과 동시에 재임용 심사가 강화되었는데, 이것이 연구의 성실성을 검증하는 제도이기보다는 재단에 의한 교원의 통제 수단으로 전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반해, 사회적 논란거리인 ‘폴리페서’의 경우 대부분 대학은 자못 관대한 자세를 취하는데, 이들의 존재야말로 정치권과의 ‘로비 통로’ 또는 ‘보험’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전임 교원들이 처해 있는 상황도 불안하지만, 더욱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은 시간강사들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 은폐되어 있는 또 다른 ‘88만 원 세대’로, 삶의 정황은 사실상 고학력 실업자와 유사하다. ‘일용잡급직’이라는 직업 분류가 웅변하듯, 이들은 고등교육의 엄연한 담당자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배제되어 있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여서, 강사들이 연이은 자살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구조에 항의해도, 한국 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한 지방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재직했던 한경희씨가 자살했다. 그의 유서에 비친 오늘의 대학 사회는 오싹하기 짝이 없다. 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연 패거리주의의 발호, 시간강사를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간주하는 비인격적인 대학 풍토, 생존하기 위해 살인적인 강의시간을 감수해야 하는 교육환경,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중년의 막막한 삶 등등. 그런 상황에서 한씨는 희망 없이 대학 사회를 배회하는 ‘유령’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현재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확인을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임시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러나 이번 회기 안에 통과되지 않으면 법안은 자동 폐기될 운명이다. 시간강사가 ‘유령’이 아닌 ‘교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문학박사>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