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개 있으면 배달 안 합니다”

2007.09.18

집배원을 물어 보호소에 격리한 개.

집배원을 물어 보호소에 격리한 개.

집배원에게 개는 애완동물이 아니다. 업무 특성상 개에 물릴 위험에 늘 노출돼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다. 배달 도중 사나운 개와 마주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위기의 순간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귀여운 개를 보아도 좀체 귀엽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개는 특별히 훈련받지 않는 한 집배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 주인에 충실한 개일수록 주인 외에 다른 사람은 보기만 해도 물어 뜯으려 하기 십상이다. 집배원이 집 주인에게 우편물을 건넬 때 개들은 대부분 주인을 해꼬지하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한다. 그러니 집배원과 개는 태생적으로 같이 갈 수 없는 관계다. 집배원의 영원한 적(敵)인 셈이다.

미국에선 집배원이 개에 물리는 사고가 한 해 3000여 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드는 비용이 매년 2500만 달러(234억 원)다. 미 우정청이 개의 생리적 활동 폭이 커지는 매년 5월 ‘개 물림 예방주간’으로 정해 전국적인 캠페인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자 할머니가 사망하면서 유산 1200만 달러(112억 원)를 손주가 아닌 애완견에게 줄 만큼 개를 끔찍이 아끼는 미국인들이지만, 개가 집배원을 무는 문제만큼은 단호하게 대응한다.

얼마 전 한인들이 많이 사는 미 캘리포니아 주 토런스 지역에서 25년째 집배원 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최문호씨(60)가 배달 도중 담장을 넘어 뛰쳐나온 개에 얼굴을 물려 중상을 입었다. 신속한 의료 조치로 생명은 건졌지만, 피를 많이 흘리고 한동안 의식을 잃어 초기에는 목숨을 걱정해야 할 만큼 큰 사고였다. 그러자 토런스 경찰은 문제의 개를 동물보호소에 감금한 뒤 청문회를 열어 개를 안락사하는 쪽으로 결정했고, 시(市)에선 개 사고 실태 조사에 나서는 한편 조례를 집배원의 안전을 높이는 쪽으로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미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지난 8월 말 이색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의 구호는 ‘우편물을 가정으로 배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곳 우정당국에서 윈디 힐이라는 지역 600여 가구에 우편물 배달을 중단한 데 대한 항의 표시인 것이다. 우정당국이 배달을 중단한 이유는 개 때문이다. 2001년 이후 그곳에서 개가 집배원을 무는 사고가 101건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정당국은 “개 주인들의 무책임한 태도로 집배원 안전이 위협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거리에 가정의 편지함을 대신할 박스를 만들어놓고 각 가정으로 갈 우편물을 그 공동 박스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자 주민들의 불만이 불같이 일어났다. 시 의회에서는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며 우정당국을 압박했다. 하지만 우정당국은 그동안 개 주인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촉구했으나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며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처럼 개 물리는 사고가 났을 때 지자체별로 대응하는 구체적 방안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집배원의 안전을 우선시한다는 원칙은 어디나 같다.

지난 3월 캐나다 우정당국은 뉴펀들랜드 주의 외딴 마을 라브라도 하우징이라는 곳에 대해 우편 배달을 한시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마을에 개똥이 너무 많다’는 것. 집배원이 개똥을 밟으면 미끄러져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게 공식적으로 밝힌 사유다. 캐다다 우정청은 이외에도 개가 목줄 없이 동네를 쏘다니는 게 집배원 눈에 띄면 그 지역 전체에 우편물 배달을 중단할 것이라는 경고문을 개 주인들에게 보내곤 한다.

이렇듯 이 나라들에는 개가 집배원의 안전을 위협하면 우정당국에서 배달을 중단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우리는 어떨까. 우정사업본부 관계자에 물어보았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천재지변이면 어쩔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 외 주민의 책임을 물어 배달을 중단하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 국민들이 가만 있겠어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종탁 jt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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