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공청협(1) 안병옥의 공문연 접수작전

2006.05.16

‘과학기술운동’의 깃발 든 386 이공계 운동권, ‘제도권’ 환경운동 전면에 나서다

1980년대 대학가 반공해운동 출신 환경운동가 안병옥의 공추련 시절. 1987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차출’되면서 전업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1980년대 대학가 반공해운동 출신 환경운동가 안병옥의 공추련 시절. 1987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차출’되면서 전업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87년 1월 20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한 건물 사무실에서 수상쩍은 회합이 열렸다. 참석자는 정호경·성내운·이길재·임채정·엄마리·오충일·김동완·정성헌·홍성훈·김병걸·이병철·최완택·최열·정문화 등 14명이었다. 하나같이 수사·정보기관이 주목하는 인물이었다.

회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렇게 된 것은 박종철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열띤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이날 회의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 정기이사회였고, 공문연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분기점

“지난 5년 간 실무자로 근무했던 정문화씨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후임 연구원은 실행이사회에서 결정합시다.”
정호경 이사장(현 안동교구 신부)의 이 발언은 박종철 사건으로 불투명해진 정국상황 못지않게 공문연의 미래에 짙은 암운을 드리웠다. 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의 활약이 없었다면 공문연이 온산병 사태와 같은 대형 이슈를 주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가 겸 연구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정국상황을 감안할 때 정문화를 붙잡아두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정문화는 YS(김영삼 전 대통령) 캠프로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정치의 장이 섰는데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미 마음으로는 정문화를 떠나보낸 지 오래였다. 대신 다른 얼굴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은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분기점으로 꼽힌다. ‘1987년 체제’라는 용어가 이미 학계에서 보통명사처럼 쓰일 정도다. 한국 사회의 모든 패러다임이 이 시기를 경계로 크게 바뀌었다는 얘기다. 이 점에서 환경운동도 예외일 수 없다. 그 상징적인 사건을 새로운 한 인물의 등장에서 볼 수 있다.

공문연은 정기이사회 보름 후인 1987년 2월 6일 실행이사회를 열었다. 여기서 정문화의 사표를 정식으로 수리하고 후임 연구원 선임과 이사진 보강 등을 논의했다. 이때 얘기된 후임 연구원의 자격 요건은 다음과 같았다.

“반공해운동·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장 주민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기에 덧붙여 자료 정리·수집을 체계화할 수 있고 ‘공해연구’를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다시 말하면 운동가로서의 자질이 먼저이고 연구자로서의 역량은 다음이라는 것이다. 행동적인 사람과 차분한 사람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차분하면서도 행동적인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공문연 이사진은 ‘행동’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고, 욕심을 부리자면 두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이면 좋겠다는 꼬리표를 단 것이다.

하지만 이때 최열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림이 완성돼 있었다. 그 이상의 조건을 가진 적임자를 찍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곧 나타난다….

이 무렵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거쳐간 곳으로 유명한 전방 제1사단에는 실습소대장 한 명이 전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행운아였다. 이등병 계급장을 단 채 박박 기고 있어야 할 시기인데 전두환 대통령 덕분에 소위로 임관해 전역할 날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전두환 아들’ 때문에 설치됐다가 곧 없어진 제도로 일반에 회자된 6개월짜리 석사장교였다. 그가 최열이 손꼽아 기다리던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이었다.

환경운동사에서 안병옥의 위치는 최열(68학번)·조중래(72학번)·조홍섭(75학번)·이덕희(77학번) 등처럼 단기필마로 환경운동권에 등장한 활동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집단적으로 환경운동권에 진입한 첫 학생운동 세대(80학번)이면서, 그 중에서 선두주자라는 점이다. 최열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대학가 이공계 학생운동권에 반공해운동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안병옥·박상철·이성실(왼쪽부터).

대학가 이공계 학생운동권에 반공해운동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안병옥·박상철·이성실(왼쪽부터).

80학번 이후 세대, 즉 386세대는 환경운동권에서도 이전 세대와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운동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이론적으로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이 환경운동사에서는 반공해운동협의회(이하 반공협)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이것이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라는 결사체로 열매를 맺는다. 즉 학생운동권에서 환경운동권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구축되는 것이다. 안병옥은 이런 흐름의 가장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많은 다른 운동가처럼 안병옥도 시대상황에 이끌려 환경운동의 길로 들어선 경우다. 그는 원래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적 취향이 강했다. 순천고 시절 꿈이 영문학도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사와 부모가 그의 진로를 일방적으로 정해버렸다. 서울대에 가기 쉽다는 이유로 이과를 선택하게 했고, 그는 어른들의 뜻을 따랐다.

그의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사실은 묘하다. 그와 구자상(현 부산환경운동연합 상근대표)·박상철(현 환경운동연합 감사, 한영회계법인 공인회계사) 등 최열 이후의 걸출한 환경운동가가 모두 경찰공무원 집안 출신이다. 최열·조홍섭·최예용은 ‘군인의 아들’ 이다. 무기를 다루는 집안에서 환경운동가가 많이 태어나는 것은 우연 치고는 이상하다.

걸출한 인재는 ‘경찰·군인의 아들’

어쨌든 안병옥은 아버지의 뜻은 따랐지만 내심 서울대에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어른들의 ‘서울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2차인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지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서울대 자연계열에 합격하고 말았다. 자신이 바라던 바가 아닌 데다가 시대상황까지 겹쳐 그는 초창기 대학생활을 극심한 방황 속에서 보냈다.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그는 기숙사에서 겪었다. 기숙사에서는 4명이 같은 방을 썼다. 이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면서도 ‘이러면 집안에 누가 되지 않을까’하는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의식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데다 서울 생활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까지 겹쳐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2학년이 돼 전공을 선택할 때 그는 수학과를 포기하고 비인기학과인 해양학과를 지망했다. 뜻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해양학은 그에게 신선한 분야였다. ‘환경’과 그의 첫 악수가 이때 비로소 이뤄진다.

1980년대는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던 만큼 공대·자연대생도 그들 특유의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권에서 이공대는 변방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이공대가 가진 고유한 속성도 작용했다. 이를테면 사회과학도에게 학생운동은 전공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전공을 더욱 심화시키고 ‘실습’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그렇지 않았다. 학습의 성격이나 양을 감안하면 학생운동 참여는 곧 전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공을 살리면서 운동에 참여하는 길은 없을까…. 이것이 자연과학도와 공학도의 고민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0년대 전반기 이공계 대학가 일각에서 싹튼 것이 이른바 ‘과학기술운동’이다.

안병옥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 이공계에는 과학기술운동을 지향하는 20여 명이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선배세대 중에 이덕희(현 영화과학 대표이사)는 학생운동에 경도돼 있었고,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환경전문기자)은 학생운동과 과학기술운동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으며, 후배세대인 안병옥은 아예 변방에 있었다.

이들의 기억을 종합하면 과학기술운동은 세 갈래 흐름으로 나타났다. 먼저 과학기술자운동이다. 과학기술자운동은 과학기술운동과는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과학기술운동은 과학·기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것으로 과학기술자운동을 포함한다. 과학기술자운동은 예를 들어 과학기술노조 결성 등 과학기술자들의 권익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공추련 초기 상근자들. 아래 왼쪽부터 최열·이상영, 위 왼쪽부터 남미경·이향숙·안병옥·이성실·박상철·. 최열·안병옥은 공문연, 이상영·남미경·이향숙은 공민협, 이성실·박상철은 공청협 출신이다.

공추련 초기 상근자들. 아래 왼쪽부터 최열·이상영, 위 왼쪽부터 남미경·이향숙·안병옥·이성실·박상철·. 최열·안병옥은 공문연, 이상영·남미경·이향숙은 공민협, 이성실·박상철은 공청협 출신이다.

반공해에 ‘계급주의 이론’ 접목

두 번째는 반핵평화운동이었다. 이 흐름은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으로 나타난 학생운동권의 반미자주화 노선과 비슷한 맥락이었고,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이하 감청) 등 기독교운동권과도 연결돼 있었다.

세 번째 흐름이 반공해운동이었다. 민주화운동사에서 과학기술운동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뒷날 환경운동으로 발전하는 반공해운동은 그보다 더 큰 영역인 시민운동을 ‘잡아먹을’ 정도로 크게 성장할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분야로 꼽힌다. 결과적으로 운동권의 ‘블루오션’이었던 셈이다.

학부 시절 안병옥은 운동권과 교유는 했지만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한동숭(현 전주대 교수·전산정보수학)·송위진(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홍성욱(현 서울대 교수·과학사) 등이 그와 친했던 동기 운동권이었다.

안병욱이 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근 때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살아남은 자로서 느끼는 죄의식과 과학기술운동의 필요성이었다. 그 다음 선택은 구체적인 아이템이었다. 그가 환경운동을 택한 것은 공문연이 펴낸 ‘내 땅이 죽어간다’(일월서각, 1983년)를 읽고서였다.

“그 책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민주화 문제가 전부가 아니구나, 이 일을 평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학부생을 포함한 공부그룹으로 시작했다. 바깥과도 연결돼 있었다. 반핵평화 부분은 감청, 공해 부분은 공해문제연구소와 연결됐다.”

안병옥과 윤제용(현 서울대 교수)·김근배(현 전북대 교수) 등 대학·대학원 동기 3인방은 학내 공해모임에서 시작해 범대학 비공개 모임인 반공협, 공개단체인 공청협으로의 조직 진화 과정을 주도하고 본격적인 반공해 대중운동기구인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까지 동행하게 된다. 다음은 김근배의 최근 술회.

“대학원에서 나는 미생물생태학, 윤제용은 공업화학, 안병옥은 해양학을 전공했다. 모두가 환경과 관련된 분야를 전공하고 있어 모임을 활발하게 벌일 수 있었다. 그 후 반공협·공청협·공추련까지 참여하고 1992년부터 점차 활동을 접게 되었다. 전공을 과학사로 바꾸면서 환경문제와 잘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공해모임에는 조홍섭·이덕희 등 선배그룹도 관여했다. 이들은 후배들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언덕이었다. 조홍섭은 1978년 긴급조치 9호로, 이덕희는 1981년 학림사건으로 각각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었다. 이공계 운동권이 드문 시절이니만큼 후배들에게 조홍섭은 공대, 이덕희는 자연대 운동권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긴급조치 9호 세대로서 운동의 질적 변화기인 1980년대까지 학내에 머문 이들에게 갈등이 없을 리는 없다. 이들이 후배세대와 함께 반공해운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은 한국 환경운동의 산고(産苦)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조홍섭의 최근 기억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과학기술운동이 대두하면서 이공계 출신의 운동권 유입이 급증했다. 상당수는 자기 전공과 관련된 운동을 하고싶어 했다. 그야말로 이공계 운동의 르네상스였다. 당시 학내 운동권은 계급운동을 지향했기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는 ‘이론’이 필요했다. 후배들이 요구한 것도 ‘운동이론’을 달라는 것이었다.”

반공협과 공청협 등 1980년대 대학가 반공해운동 그룹을 ‘지도’한 조홍섭·이덕희(왼쪽부터).

반공협과 공청협 등 1980년대 대학가 반공해운동 그룹을 ‘지도’한 조홍섭·이덕희(왼쪽부터).

당시 반공해운동은 선진국에서나 하는 중산층운동으로 치부하는 게 운동권의 보편적 정서였다. 운동으로 쳐주지도 않는 이런 분위기를 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자본주의적이고 좌파적이고 계급운동적인 이론의 기반이 필요했다.
조홍섭은 일찍이 이런 고민을 가장 치열하게 했고 그 고민의 결과를 실천에 옮긴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대학생들의 반공해운동 입문서가 된 ‘공해의 정치경제학’(츠르 시게토, 풀빛, 1983년) 번역자가 바로 그와 이필렬(현 방송통신대 교수, 에너지대안센터 대표)이다. 조홍섭의 말을 더 들어보면….

“일본 좌파의 공해운동, 거기서 이론적 가능성을 보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해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공해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반공해운동은 환경문제와 다르다. 환경운동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반공해운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싸움이다. 그야말로 반자본주의적이고 계급적 관점에 선 운동이다.’대학생 세미나를 할 때 내가 주로 펼친 논리였다.”
이론화 작업 못지않게 선배그룹이 맞닥뜨린 것이 전업 활동가 문제였다. 반공해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누군가 직장을 갖지 않고 여기에 전력투구해야 하는데, 후배들은 그 총대를 선배그룹에서 메주기를 바랐다. 당시 조홍섭은 유네스코, 이덕희는 영인과학에 이미 취직해 있었다.

후배들의 희망은 이뤄지지 않지만 서울대 공해모임은 1984년 9월 반공협으로 발전한다. 협의회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은 숙명여대(이성실·이수경), 연세대(박상철) 등 다른 그룹과 결합한 형태를 띠었기 때문이다.

연세대 수학과 81학번인 박상철 역시 과학기술운동의 흐름을 타고 학내에서 자연철학회라는 동아리를 결성해 활동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동아리가 잘 되지 않았다. 졸업할 무렵 흐지부지돼버렸다. 그는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반공협이란 단체가 만들어진 것을 알고 MT에 따라갔다. 이를 계기로 반공협에 참여한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여기에 매달렸다(그 바람에 그는 1987년에야 졸업하게 된다).

“공문연, 시원찮은데 말아먹자”

반공협은 사무실도 없는 언더그라운드 조직이었지만 활동은 왕성했다. 안병옥·박상철·강윤재 등 지방 출신이 공동으로 신림동에 방 하나를 얻어 아지트로 삼았다. 이들은 온산병 사태 때 현장조사를 하는 등 공문연의 손발 노릇을 했다. 박상철이 1998년 공인회계사의 길로 들어서기 전까지 전업 활동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이런 현장 활동 경험이었다.

반공협 자체가 언더그라운드 조직이었던 까닭에 이들이 활동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장조사를 반공협이 했어도 발표는 공문연 이름으로 한 적도 있다. 온산병 사태가 사회문제가 되자 이를 취재하던 한 기자가 이성실(자연그림책 작가, 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저소생물분과 실행위원)에게 “비밀결사인가”라고 물었을 정도다.

이렇게 환경운동권의 저변이 확대되고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 절실하게 대두한 또 하나의 문제가 전업 활동가의 확보였다. 최열도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반공협의 자원활동가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공청협 시절 박상철에 이어 상근 활동가로 뛰어든 이성실의 최근 회고.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반공해운동에 전념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번역을 하거나 여기저기 글을 써주고 원고료를 받거나…. 최열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대학원 과정을 마친 안병옥은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이제 공부는 안 한다’는 것이고, 둘은 ‘반공협에 상근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배가 전업 운동가로 나서기를 바라던 그로서는 이제 와서 후배에게 이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부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힘들게 찾아서 차곡차곡 모아놓은 많은 분량의 외국 자료, 해양생태학 관련 서적, 논문을 쓰기 위해 마련한 스킨스쿠버 장비 등을 교수·동료·후배에게 몽땅 줘버렸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정리하고 군에 갔다.

1987년 2월 제대했을 때 그는 이미 공문연의 정문화 후임 연구원으로 내정돼 있었다. 공부와 취직을 포기하고 상근을 각오한 그였지만 당혹스러웠다. 상근은 상근인데 반공협이 아니라 공문연이라니…. 반공협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그러면 어때. 공문연, 그거 시원찮은데 우리가 말아먹으면 될 것 아니냐.”
농담이었지만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생각하자. 선배들한테 얘기해서 공문연 옆에 사무실을 내도록 하자. 그렇게 되면….
‘우리가 공문연을 접수하는 것 아닌가!’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