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딩으로 만드는 생추어리 프로젝트

주영재 기자
2021.06.07

동물해방물결, 15마리 소 구출 비용 모금… 동물권 인식 확산 희망

송아지는 태어난 지 3일 정도만 엄마 소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우유를 생산할 수 없는 수송아지는 송아지 고기용으로 4~8개월 후 도축되거나 고기를 사육하는 농장에 팔린다. 농장에 팔려 성장 촉진제가 든 액체사료나 곡물 사료를 먹으며 자란 소는 몸집이 금세 비대해진다. 그러다 2년이 되기 전 도축된다.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하려고 하는 경기도 인천 소재 한 농장의 소들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생김새도, 성격도 제각각이다. / 동물해방물결/이승찬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하려고 하는 경기도 인천 소재 한 농장의 소들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생김새도, 성격도 제각각이다. / 동물해방물결/이승찬

경기도의 한 농장에 비슷한 경험을 했을 소 15“명(命)”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소들은 인간이 젖소로 부르는 소 중에서도 가장 널리 퍼진 홀스타인종에 속한다. 모두 2019년 10월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고향도 파주로 같다. 도움의 손길이 없다면, 이 소들의 생명은 아마 오는 8월 말에 끝날 터이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육우의 몸값이 가장 높아질 때이다.

다행히 아직 3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동물권 옹호단체 ‘동물해방물결(동해물)’은 이 소들을 구조해 축산 피해 동물을 위한 ‘생추어리(sanctuary)’를 만들려고 한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처럼 생추어리는 축산 공장과 실험실, 동물원 등에서 학대받던 동물이 건강을 회복하고, 평온하고 자유롭게 여생을 살 수 있도록 돌보는 곳이다.

생추어리, 비거니즘 확산의 진앙지

지금까지 지구에 산 사람은 1000억명이 넘는다. 이중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6억1900만명이다. 인간은 3일마다 그만큼의 동물을 죽인다. 세계식량기구(FAO)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동안 721억1877만마리의 닭이 살해됐다. 소는 3억2451만마리, 돼지는 13억4854만마리가 죽었다. 축산 공장의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다. 그 끝에서 치킨, 스테이크, 삼겹살이라는 상품으로 바뀌어 바코드가 찍히고 우리의 장바구니로 들어간다.

눈 뜨고 못 볼 참상이 인간의 고기로 선택된 동물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동물의 삶을 차별적으로 규정하고, 그 결과 어떤 동물은 거대한 고통을 겪는다. 동물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를 ‘종차별주의’로 규정한다. <동물 해방>을 쓴 철학자 피터 싱어에 따르면 종차별주의는 자기가 소속된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편견 또는 왜곡된 태도를 말한다. 이런 종차별을 해제하고 동물이 그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상태를 ‘동물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해방을 추구하는 이들은 인간과 동물이 모두 고통을 느끼는 ‘지각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 소가 큰 스트레스를 겪고 며칠 동안 울 듯, 동물도 어미와 새끼의 유대감을 강하게 느낀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을 뿐, 그들도 의사소통을 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도 한다. 인간이 보기엔 모두 똑같아 보여도 동물도 서로의 얼굴을 구분한다.

생추어리는 우리 대다수가 보지 못한 동물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동물해방물결에서 생추어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승희 캠페이너는 “공장 같은 우리에 갇혀 있거나 인간의 억압을 당하는 상황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그들만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는 실제의 현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기로 알고 있던 동물들이 실제 자연상태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동물에 가졌던 편견과 차별적인 태도를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이 모든 동물의 삶을 존중하고, 모든 동물의 착취에 반대하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인 비거니즘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

국내에서만 2019년 한해 85만마리의 소가 도살됐다. 15마리의 소를 구해 생추어리를 만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활동가들은 공장식 축산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시작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승희 캠페이너는 “구조라는 목표와 함께 육식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동물권을 인지하는 구체적인 장소로서의 교육적 역할, 동물해방 정책을 고민하는 사회적 인식의 확산이라는 목표가 있다”면서 “비거니즘의 물결이 퍼져나가는 진앙지라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펀딩으로 만드는 생추어리 프로젝트

소와 땅을 구할 후원 절실

해외에 약 150곳 정도의 생추어리가 있다고 하지만 국내에서는 지난해 새벽이 생추어리가 생긴 이후 아직 소식이 없다. 동물 구조부터 땅을 마련해 이들이 노후까지 살 수 있도록 보호하는데 만만찮은 자원이 들기 때문이다. 동해물은 우선 소를 농장에서 구출할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농장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소를 내주는 대신 농장주가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업비용’ 제공을 약속했는데 그 비용이 만만찮다. 한마리에 500만원 정도다. 한승희 캠페이너는 “시간이 없으니 소를 한명이라도 살리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고, 땅과 운영비는 해피빈과 텀블벅 등 소셜 펀딩을 활용해 모을 생각이다”고 말했다. 사회공헌과 비거니즘에 관심이 있는 기업과 지자체의 후원도 기대하고 있다.

생추어리를 위한 땅을 찾기도 쉽진 않다. 유휴 산지를 활용해 초지를 조성하고, 가축을 방목 사육하는 ‘산지생태축산’ 기준에 따르면 최소한 수천평의 땅이 필요하다. 활동가가 거주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대중교통과 전기·수도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가축 전염병으로 살처분이 될 위험도 있기 때문에 근처에 도살장이나 농장이 없어야 한다. 국내에선 강원도 외엔 이런 조건에 맞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동해물도 강원도를 우선 염두에 두고 있다. 일이 잘 진행됐을 때의 고민이다. 한승희 캠페이너는 “소는 개나 고양이처럼 임시거처로 작은 공간을 쓸 수 없어서 막막하다”면서 “누군가 땅을 내준다고 하면 거기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이라 먼저 어느 정도 땅이 필요하다고 제안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시거처 역할을 할 수 있는 빈 축사나 외양간이라도 제보를 받아 구한다면 일단 소를 나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했다.

고기나 전시물이 아닌 동물로 살 수 있게

동해물의 생추어리 프로젝트는 다른 생추어리에 비해서도 도전적이다. 동물과 땅 모두 없는 상황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모범적인 생추어리로 주목받는 독일의 ‘호프 부텐란트’의 경우 3대째 낙농업을 승계한 농장주 얀 게르데스가 낙농업에 회의를 품고 2002년 생추어리로 전환한 곳이다. 기후, 환경, 동물 이슈를 다루는 창작 집단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에서 활동하는 현희진 작가는 “땅과 소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출발한 부텐란트와 달리 동해물은 땅과 소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작부터 큰 규모의 후원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생추어리는 동물을 죽을 때까지 돌본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보호만 담당하는 동물보호센터와 다르다. 자연히 생추어리에서의 활동가 생활도 쉽지 않다. 호프 부텐란트의 경우도 얀과 동물 해방 운동가 카린 뮈크가 함께 생추어리 지기로 일하는데 하루 일과가 생추어리 활동으로 빼곡히 짜여 있다. 현 작가는 “사람들이 먹는 소는 6개월 미만의 송아지인데 소는 실제 30년 이상을 살 수도 있다. 그런데 30세에 생추어리 지기로 살겠다고 하면 60세가 될 때까지 생추어리만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실제로 동해물의 할동가들이나 나도 50~60세가 돼도 이 활동을 할 수 있을까, 각오하고 시작한다”고 말했다.

현 작가는 사진과 글로 동해물 생추어리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농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환경에 있던 소가 정말 행복하게 늙은 모습을 사진으로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면서 “동물의 삶의 목적이 고기나 동물원 전시동물처럼 장난감이나 인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동물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생추어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몇마리가 아니라 몇명(命)’ 종차별적 언어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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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아니라 명(命)이라 이야기하는 이유를 설명할 시간이 됐다.” 윤나리 동물해방물결 사무국장은 지난 5월 25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종평등한 언어생활을 위한 워크숍’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차별적 언어를 개선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런 흐름에서 동물과 인간을 차별하는 언어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윤 사무국장은 “성차별적이거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생각에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유모차를 유아차로, 자궁을 세포가 착상하는 기관이라는 뜻의 ‘포궁’으로 바꾸고 있다”면서 “언어가 사고 체계와 문화에 핵심적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종차별적 언어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워크숍에서는 종차별적 언어를 제보받아 이중 시급히 개선이 필요한 용어들을 추리는 작업도 진행했다. 대표적으로 물고기를 들 수 있다. 느끼고 살아 있는 존재에 식용하는 동물의 살을 뜻하는 ‘고기’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물고기 대신 물에서 사는 존재라는 뜻의 ‘물살이’를 제안했다. 수를 세는 단위도 마리가 아닌 명을 쓰자고 했다. 명은 인간을 셀 때 쓰는 ‘이름 명(名)’이 아니라 ‘목숨 명(命)’이다. 참가자들은 “몇마리가 죽었다 보다 몇명이 죽었다고 말하니 더 확 와닿는다”고 말했다.

머리를 대가리로, 입을 주둥이, 목을 모가지로 부르는 등 인간과 같은 부위를 비하의 의미로 부르는 것도 피하자고 했다. 동물에게만 쓰는 말인 암컷, 수컷, 폐사, 도축을 여성, 남성, 사망, 살해로 부르자는 제안도 나왔다. ‘꿀팁’을 ‘귤팁’으로, 흔히 예능 자막에서 개 그림과 함께 쓰는 신조어 ‘개좋다’, ‘개웃기다’를 ‘깨좋다’, ‘깨웃기다’로 바꾸자는 제안도 있었다.

종차별적 언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은 해외에서도 활발하다. 모피 금지 운동 단체로 유명한 ‘PETA’의 경우 지난 1월 27일 트위터에서 “단어는 더욱 포용적인 세상을 만들 수도, 혹은 억압을 영원히 지속할 수도 있다”면서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해 그를 동물로 부르는 행위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며, 동물에게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신화를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닭을 겁쟁이로, 뱀을 비열한 사람을 표현하는 뜻으로 쓰는 등 인간 우월주의적 언어를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침팬지를 인간과 동등한 개체로 보고 연구해온 제인 구달의 사례도 있다. 제인 구달은 1960년대 발표한 논문에서 침팬지를 말할 때 성별에 따라 그(He)나 그녀(She)로 표현했는데 논문 심사자가 이를 오류라고 지적하며 수정을 요구해 논쟁이 벌어졌다. 한승희 캠페이너는 “제인 구달은 비인간 동물을 향해 사물에 관한 대명사를 쓰는 대신 사람에 관한 지시대명사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면서 “최근 동물권 단체가 AP통신에 ‘it’ 대신 ‘he’나 ‘she’를 쓰자고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라고 설명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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