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세월호 1000일, 반성된 한국 사회

참사 초기 각종 활동 위협받았지만, 시민들 의식 변화 겪으며 진상규명 새국면 맞아

2014년 9월 2일은 세월호 참사 139일째 되던 날이었다. 오후 2시 무렵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세월호 가족 100여명과 가톨릭 수녀, 불교 승려 등 50여명이 청와대를 향해 줄지어 말없이 절을 했다. 원래는 삼보일배(三步一拜·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기)로 청와대까지 가서 세월호특별법을 지지하는 시민들 136만명의 서명을 제출할 계획이었다. 경찰이 행진을 막아 가족들은 제자리에서 계속 절만 했다. 엎드린 유가족들의 등 위로 빗줄기와 함께 이따금씩 경찰의 안내방송이 쏟아졌다. “여러분들은 지금 미신고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즉각 해산해주시기 바랍니다.” 가족들은 절만 계속 했다. 가족들 옆에서 “안전사회 진상규명”이라고 외치며 북을 치는 이의 목소리가 젖어들어갔다. 이 광경이 4시간16분 동안 이어졌다.

경찰은 이날 차벽 등을 동원해 광화문광장을 봉쇄했다. 이날 행사는 방송사의 메인 뉴스를 장식하지 못했다. 많은 시민들이 이날 일을 알지 못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절은 멈췄다. 단원고 학생 ‘재욱 엄마’ 홍영미씨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아이들이 죽기 직전에 뭐가 생각났겠어요. ‘엄마’ 하고 외쳤겠죠. 나는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경기 안산 정부합동분향소 입구 도로는 안산 지역 각계 시민사회 단체가 건 노란 현수막이 줄지어져 있다. 1000일 전에는 세월호 탑승객들의 무사귀환을 빌던 메시지는 세월호 참사가 밝힌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바뀌었다. / 박은하 기자

경기 안산 정부합동분향소 입구 도로는 안산 지역 각계 시민사회 단체가 건 노란 현수막이 줄지어져 있다. 1000일 전에는 세월호 탑승객들의 무사귀환을 빌던 메시지는 세월호 참사가 밝힌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바뀌었다. / 박은하 기자

특조위 활동 끝에 청와대 언론장악 시도 밝혀

1월 6일 홍씨와 통화했다. “이제야 겨우 ‘물꼬가 트였다’는 기분입니다.” 세월호특별법은 가족들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 채 통과됐고, 그마저 활동에 방해를 받다 해산했다. 그러나 특조위 활동 끝에 청와대의 언론장악 시도 등을 밝혀냈다. 새누리당은 제1당의 지위를 잃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권한이 정지됐다. ‘세월호 7시간’ 행적에 의문을 표해도 의심받지 않게 됐다. 세월호 가족들의 변호사로 활동했던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박주민 변호사는 지난해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다. 박 의원은 보다 강력한 권한을 지닌 특조위 활동을 보장하는 법안을 내놓은 상태다. 세월호 선체와 미수습자 9명은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1000일 동안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과 시민들의 의식구조는 변화를 겪었다. 그 중심에 세월호 가족들이 있었다.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 앞 주차장 한쪽에는 컨테이너 건물이 여러 개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세월호와 관련한 각종 기록물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416기억저장소’ 사무실로 쓰인다. 416기억저장소 사무실 옆에는 세월호 연표와 더불어 ‘夜叉(야차)’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야차는 불교에 등장하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을 잡아먹고 상해를 입힌다는 잔인한 귀신’이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상처를 낸 발언을 정리해 두고 있다. 언론의 전원구조 오보도 ‘야차’에 포함된다.

‘야차’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던 시기는 2014년 5월이었다. 2014년 5월 이전의 발언들은 세월호 가족 자체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향하던 비난에 대한 불편함을 쏟아내거나,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들이 참사를 대하는 무성의하고 무신경한 태도를 뜻하지 않게 노출한 내용이었다. 2014년 5월 이후의 발언은 달랐다. 강도가 높고, 적대적이며, ‘혈세’, ‘벼슬’ 등 세월호 가족들이 국민들에게 부담 지우는 존재라는 뜻을 보다 분명히했다. 종교인, 교수, 극우언론 등이 전면에 나섰다.

세월호 미수습자 중 한 명인 조은화양의 어머니 이금희씨가 딸에게 적은 편지.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 세월호 가족 대기실로 쓰이는 컨테이너에 걸려 있다. 조은화양, 허댜윤양, 박현철군, 박영인군(단원고학생), 고창석 교사, 양승진 교사(단원교 교사), 권재근·권혁규 부자, 이영숙씨가 현재 미수습 상태로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 박은하 기자

세월호 미수습자 중 한 명인 조은화양의 어머니 이금희씨가 딸에게 적은 편지.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 세월호 가족 대기실로 쓰이는 컨테이너에 걸려 있다. 조은화양, 허댜윤양, 박현철군, 박영인군(단원고학생), 고창석 교사, 양승진 교사(단원교 교사), 권재근·권혁규 부자, 이영숙씨가 현재 미수습 상태로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 박은하 기자

“(세월호 침몰사고가) 너무나 큰 불행이지만 국민 의식부터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2014년 4월 22일 송영선 전 새누리당 의원)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물러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른 뜻이 있는 것”(2014년 4월 25일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유가족이 무슨 벼슬 딴 것처럼 쌩 난리 친다. 세월호 유가족에게는 국민의 혈세 한 푼도 주어서는 안 된다.”(2014년 5월 11일 김호월 홍익대 광고홍보대학원 교수)”

세월호 가족들이 ‘자식을 잃은 불쌍한 유가족’으로 동정 받는 위치에서 더 나아가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며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으로 변모하자 정부와 가족은 대립했다. 한 가족은 당시 심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돈이오? 어제도 어떤 엄마랑 그런 얘기를 했는데 돈이오? 돈 필요 없죠. (중략) 그렇게 돈 받는다고 다 정리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돈 받아도 이거는 정리 안 돼요. 내가 죽어야 정리되는 것이고, 내가 죽어야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고, 내 죽기 전까지 진실을 밝힐까 그게 걱정인데…. 세상이 이렇게 바뀌는 거죠? 그렇죠? 근데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해서….”(<4·16 구술증언록-유가족편 제2권>, 416기억저장소 구술증언팀)

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에 매달린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식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뿐이 아니었다. ‘내가 왜 아이를 단원고에 보냈지?,’ ‘왜 그날 아침 전화를 못 받았지?’, ‘왜 집안형편 생각해서 수학여행 안 간다는 아이 가게 했지?’라는 후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본질적인 부분으로 향했다. “도보할 때요, 막 도보를 하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자식 좀 그만 팔아먹으래요. 다 빨갱이래요. 우리 보구. (중략) 내가 5·18 진실을 알고 행동을 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희생된 것 같고 더 미안하고 죄책감이 더 들거든요.” (<4·16 구술증언록-유가족편 제2권>, 416기억저장소 구술증언팀)

특별법 제정에 매달린 건 자식에 대한 죄책감

‘충격’과 ‘발견’, ‘죄책감’, ‘변화’는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 고준우씨(22·고려대 사회학과)는 스무 살 이후 세상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 ‘세월호’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왜 못 구했지?’ 궁금했습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따져보며 생명과 이윤이 저울질되는 사회라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충격받았습니다. 돈을 아낀 결과 누군가는 돈을 얻지만 누군가는 죽어요. 그것이 불평등이더라구요.” 고씨는 2014년 5월 18일 ‘가만히 있으라’ 침묵집회에 참여했다 연행돼 난생 처음 유치장 신세를 졌다. 이후 대학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대학가에서는 무능한 정부와 탐욕스러운 사회에 분노하면서도‘아무도 나를 지켜줄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별법 관련 특례입학에 대한 반발여론도 컸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성적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반을 만들어 공부만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특별법 같은 소식들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지이야기]세월호 1000일, 반성된 한국 사회

세월호 가족들은 2014년 8월 22일부터 11월 15일까지 76일 동안 청와대에서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했다. 청와대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이었다. 이 기간 동안 경찰은 청와대 앞 길목을 지키고 서서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동시에 ‘유민아빠’ 김영오씨 등의 단식농성이 진행된 광화문광장에는 ‘자유대학생연합’,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의 이름을 내건 단체가 세월호 가족들을 위협하는 시위를 했다. 이른바 ‘폭식투쟁’도 이때 벌어졌다. 지난해 5월 전국경제인엽합회가 어버이연합과 탈북자 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기춘 청와대 전 비서실장이 언론 통제에 나선 사실도 ‘김영한 비망록’을 통해 드러났다. 청와대는 공권력을 동원해 수비하고 공격이 필요한 경우 공권력의 외주를 받은 시민사회단체를 동원해 세월호 참사를 관리해온 셈이다.

관리의 구조를 깨닫고 넘어서려 한 이들도 세월호 가족들이었다. “다시는 무언가를 요구하러 청와대를 찾지 않겠습니다.” 2014년 11월 15일 청운효자동사무소 농성을 접는 자리에서 세월호 가족들이 말했다. 홍영미씨도 “언론이 아무리 해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언론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가족들 1월 7일 ‘국민 특조위’ 출범

수원에 사는 이은주씨(47)도 세월호 가족들이 만난 시민들 중 하나다. 이씨는 세월호 참사 직후 동네 촛불집회를 열었다. 세월호 가족들이 전국을 다니며 간담회를 열게 되니 자연스럽게 만났다. “동네에서 뭐라도 해보자며 매주 모였습니다. 1주년에 세월호 가족들이 왔을 때 동네집회인데도 수원 곳곳에서 200명이나 왔어요.” 2015년 4월의 분위기는 달랐다. “처음 2년 동안 이 모임을 열심히 준비하시던 분들이 지쳐서 힘들어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소극적으로 참여했던 분들이 바통을 이어받듯이 준비를 맡았어요. 그렇게 버텼어요. 세월호 2주기 때도 유가족분들을 보며 이 분들은 동정하고 슬퍼하는 이웃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모임은 월 1회로 변경됐지만 중단되지는 않았다. 이씨는 “우리끼리만 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모임이 된 것 아닌가 회의감도 적지 않았어요. 그래도 ‘우주의 기운’을 바꾸는 데 보탬은 되지 않았을까요. 탄핵국면을 보면서 어둠이 너무 진하면 동이 튼다는 것을 느꼈다고 할까요. 아, 그래도 행동하면 바뀌는구나. 1000일을 앞두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을 지켜본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국회 본청을 빠져나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을 지켜본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국회 본청을 빠져나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강고할 줄 알았던 청와대의 ‘세월호 관리체제’는 사실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대학생 고준우씨는 “2015년에 너무 힘들었어요. 학내 간담회에 온 유가족 유경근씨가 ‘노란리본 단 시민들 보면 고맙다. 잊혀지진 않으니 언젠가는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고 말한 걸 듣고 겨우겨우 버텄어요. 그런데 2016년 3월에 학내 유가족 간담회를 열었는데, 100명 들어가는 강당이 꽉 찼습니다. 평소 30여명 오던 편이었어요”고 말했다. 2016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단원고 희생자들과 동갑이었다. 홍영미씨는 “다른 가족에게 섬마을에서 노란리본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할 수 없이 뭉클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학계에도 충격을 줬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은 학문이 이를 해석하는 데도 변화시키는 데도 실패했다는 무거운 부채의식을 남겼다. 지난해 4월 16일 출간된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도 이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김명희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집필진을 대표해 쓴 글에서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우리 사회가 겪는 사회적 고통이 그 고통을 가져온 국가-사회의 재구조화 없이는 치유될 수 없다고 바라본다는 점에서 견해를 같이한다”며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세월호가 한국 사회에 던진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되묻기와 응답은 여러 형태로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진상규명 작업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세월호 가족들은 세월호 1000일을 앞두고 ‘국민 특조위’를 꾸릴 예정이다. 4·16세월호참사국민조사위원회(4·16국민조사위) 준비위원회는 1월 4일 서울 마포구 YMCA 전국연맹 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유가족과 세월호특조위 조사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민간조사기구인 국민조사위가 7일 출범한다고 밝혔다. 유경근 준비위원장(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지난해 세월호특조위가 해산되면서 유가족들은 진상조사는 어떤 경우라도 중단돼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며 “어떻게 하면 세월호 선체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 선체 조사 등 진상조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결과가 바로 국민조사위”라고 말했다. 유 위원장은 이어 “새로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신속처리법안으로 지정돼 두 번째 특조위가 구성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국민조사위가 2기 특조위에 분명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내 딸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다.”, “엄마니까 포기하지 않을게.” 안산 합동분향소 앞 컨테이너에는 미수습자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는 가족에게 남긴 편지가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 심리학자인 이승욱 닛부타의 숲-정신분석클리닉 원장은 “각종 사건에서 가장 약자들은 해결되지 못한 사람들, 세월호의 경우 미수습자 가족들”이라며 “세월호가 한국 사회에 남긴 것이라면 세월호 선체와 미수습자, 그리고 노력하면 현실을 바꿔낼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은주씨는 “1000일 동안 아직 유가족이 되지 못한 분들도 있다고 생각하면 부끄럽다. 광화문 10차 촛불집회에서 허다윤양 어머니께서 내 딸은 1000일 동안 바다에 있다’고 할 때 눈물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활동가들은 ‘416 운동’이라고 부른다. 세월호를 넘어선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와 직면한다는 의미에서다. 홍영미씨는 “416 운동은 범국민 양심회복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의 침몰은 양심의 침몰이었고, 세월호가 인양되고 진상이 규명하는 과정이 양심 회복과정”이라며 “그동안 씨앗을 뿌리는 심정이었다. 언젠가 진흙에서 연꽃이 피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박은하·백철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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