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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실용’ 달라진 게 뭐 있나

2009.09.08

대선 때와 별 차이 없는 ‘근본적 한계’… 진보진영·보수우파 양쪽 다 비판

지난 8월19일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직원들이 라인 전면 재가동을 위해 작업하고 있다. 정부는 쌍용차 노사가 극한 대립을 벌이는 동안 노사간 중재 노력을 하지 않았다. 중도실용을 표방하면서 친서민 정책을 강조해 온 정부의 다짐이 무색하다. <연합뉴스>

지난 8월19일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직원들이 라인 전면 재가동을 위해 작업하고 있다. 정부는 쌍용차 노사가 극한 대립을 벌이는 동안 노사간 중재 노력을 하지 않았다. 중도실용을 표방하면서 친서민 정책을 강조해 온 정부의 다짐이 무색하다. <연합뉴스>

중도실용은 모호한 말이다. 정치권에서 들고나온 말이지만 엄밀하게 규정된 정치학적 개념이라기보다 정치권의 전략적 목표에 맞게 편의적으로 조합한 표현이다.

정해구 성공회대 정치학과 교수는 “중도나 실용은 국민들이 진보와 보수 간 이념적 갈등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이념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보수 논객이면서도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는 “알맹이가 없고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힌다”고 말했다.

친서민 행보 일회성 이벤트로 표출
물론 개념과 체계를 추구하는 정치학의 영역과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해야 하는 현실 정치의 영역은 다르다. 문제는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의 중도실용이 실제로는 ‘부자 정부’라는 비판을 불러왔던 출범 초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체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6월 ‘근원적 처방’이라며 ‘중도실용’을 들고 나왔지만 합리적 보수를 자임하는 사람들이나 시민사회 진영의 평가는 오히려 현 정부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쪽으로 모인다. 중도실용이라는 것이 새로운 것도 아닐뿐더러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도실용이란 말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때부터 중도와 실용을 강조했다.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법과 원칙’을 유난히 강조하면서 여론의 시야에서 잠시 사라지긴 했지만 현 정부가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은 과거나 지금이나 ‘중도실용’이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이런 관점에서 “달라진 게 없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출범 초기에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정부는 지금은 ‘친서민’을 강조하고 있다. ‘친서민’은 이념 문제 대신 실질적인 민생 행보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이어서 중도실용 강화론의 주춧돌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정부의 친서민 행보가 시스템과 제도를 통한 서민 지향적 정책의 구현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회성 이벤트의 나열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대학 등록금 취업 후 상환제, 전세자금 대출 확대, 보금자리주택 공급 등 정책을 몇 달 사이에 잇따라 내놓았다. 그러나 발표 후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얻은 등록금 취업 후 상환제는 등록금 부담을 일시적으로 ‘유예’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등록금 상승 억제나 인하’ 같은 근본적 처방과는 거리가 멀다.

노동 문제로 들어가면 중도실용의 한계는 더욱 명백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초기에는 잡셰어링과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일말의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쌍용자동차 사태가 보여주듯 노동정책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중도실용의 한 축으로 ‘친서민 행보’를 강조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문제 등 노동자를 홀대하면서 친서민을 지향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8월25일 발표한 ‘2009 세제개편안’에서 중소기업의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한 중소기업 세액공제 제도를 없애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제도는 중소기업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 1명당 30만원의 법인세나 소득세를 공제하는 제도다.

사회복지 차원에서 중도실용을 따져보면 현 정부가 추구하는 중도와 실용의 향방이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난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독일의 경우와 비교할 때 현 정부가 말하는 중도는 중도가 아니라고 본다. 독일의 경우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련은 우파,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이끌던 사민당은 좌파다. 이런 경우 중도의 영역은 시장을 강조하는 우파와 분배의 평등을 강조하는 좌파가 시장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기회와 분배의 평등을 달성하는 균형점에서 형성된다. 이상이 공동대표는 “결국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중도는 경제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 복지 측면에서 사회복지 국가의 건설로 귀결된다”면서 “사회복지 예산 감축과 부자 감세 기조를 유지하는 한 현 정부는 중도가 아니라 우파 시장만능주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극우보수 논객들 불만 쏟아내
정해구 교수는 “한 정권의 노선이 쉽게 바뀌기는 어렵다”면서 “집권 초기 촛불집회를 겪으면서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던 방향을 약간 틀려고 하는 기미는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친서민 행보를 걷는다고 볼 수는 없다. 정치적 수사다”라고 말했다.

중도강화론이 안고 있는 한계는 핵심 지지층인 보수우파 진영에서도 문제 제기가 잇따르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보수우파 진영이 제기하는 비판의 핵심은 현 정부가 보수의 가치를 저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극우보수 논객들은 최근 해빙 조짐을 보이고 있는 남북 관계와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을 계기로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8월22일 자신의 웹사이트 ‘조갑제 닷컴’에 올린 글에서 이 대통령을 ‘국가배신자’라고 불렀다. 그는 ‘국가배신자 이명박은 대한민국 노선을 버렸다!’는 제목의 이 글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선서하였던 자가 대한민국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대한민국을 강제로 끌고 가서 김대중한테 절하게 하였다”고 비판했다. 조 전 대표는 이어 이 대통령의 ‘중도보수’는 “대한민국의 노선에서 이탈하기 위한 위장막”이라고 규정했다.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대표도 유사한 논리를 폈다. 서 대표는 전화통화에서 “중도실용이 이 대통령의 말처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헌법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면 문제 될 게 없다”면서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과 북한 특사 조문단을 허용한 것은 ‘보수층에 대한 배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리가 좌파 정권 10년 동안 싸운 것은 정권 교체를 위해서였다”면서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보수층 지지자들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말했다.

뉴라이트 계열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지난 8월4일 바른사회시민사회 토론회 주제 발표를 통해 ‘중도강화론’의 진정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지속적인 노선이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달았다. 박 교수는 “스스로 소통 노력이 부족했다고 반성하고 그 기초 위에서 보수에서 한 발 물러난 ‘중도실용’을 표방했다면 소통과 통합 관점에서 크게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중도를 내세우면서 진보와 보수를 모두 껴안는 정도라면 “대단한 철학이나 담대한 비전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이 정부가 스스로를 보수라고 하면 약자 보호나 경제적 패자 배려, 서민친화와 같은 정치는 할 수 없는 것일까”라고 묻으면서 ‘보수’의 꼬리표를 떼고 굳이 ‘중도’로 불러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진보 진영이 중도실용을 알맹이 없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면 보수우파 진영은 보수가치의 훼절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중도실용이 양 진영으로부터 모두 비판받고 있는 이유는 정부의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은 탓일까, 아니면 장기적인 비전과 철학 없이 일시적인 지지율 상승만을 노리는 정부의 임기응변적 노림수가 간파당했기 때문일까. 정부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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