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원스>·<라이카>, 음악극 <노베첸토>, 연극 <생추어리 시티>
경계와 경계인을 다루는 서사가 진일보하고 있다. 국가와 인종의 탈경계를 지향하는 난민과 이민자 중심에서 인간과 비인간으로 확장해 일상의 경계를 재인식하는 작품까지 다양하다. 아일랜드 더블린 토박이 남성과 체코 이민자 여성이 서로의 결여를 음악적 연대로 채우는 뮤지컬 <원스>, 이민자의 아기로 배에 버려져 평생 배와 함께 성장한 무적자 노베첸토의 삶을 담은 음악극 <노베첸토>, 불법체류 청소년들의 불안과 성 정체성을 논한 연극 <생추어리 시티>, 우주개 라이카와 인간 캐롤라인의 우정을 어린 왕자로 풀어낸 뮤지컬 <라이카> 등이다.
액터뮤지션과 재즈피아니스트의 연대
적극적인 관객 참여 뮤지컬 <원스>(엔다 월시 극본, 황석희 번역, 글렌 핸사드·마르게타 이글로바 음악, 존 티파니 연출, 이지영 협력연출)는 프리쇼부터 탈경계적이다. 관객들은 30여 분 전부터 공연장에 들어서 무대 위, <원스>의 공간적 배경인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펍으로 향한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무대를 둘러본다. 앞선 관객들이 몸을 흔들며 출연진들의 연주와 노래를 즐기는 모습이 흥겹다. 아일랜드풍 리듬과 음률에 몸을 맡기며 신기에 가까운 배우들의 연주를 눈앞에서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공연 시간이다. 마시던 음료를 손에 든 채 객석에 자리 잡은 관객들 입장에서 이어지는 본 공연은 관람이 아닌 동참이다. 더블린 토박이 남자 가이(윤형렬·이충주·한승윤 분)와 체코 억양이 심한 이민자 걸(박지연·이예은 분)은 무대 위에서 각자의 음악적 삶에 대해 실랑이를 벌인다. 실연의 아픔으로 음악을 접으려는 가이를 끌어올리는 걸은 체코 이민자들의 세계로 가이를 초대한다. 국경과 인종, 언어를 넘어선 연대가 음악을 매개로 무르익으면서 남녀 간의 모호한 사랑은 인류애로 선순환한다. 20여명 출연 배우가 바꿔가며 직접 연주하는 30개 전후의 다양한 악기, 동시에 진행하는 군무와 노래가 경이롭다. 전 출연진이 액터뮤지션(연주와 연기, 노래를 모두 다 소화하는 전방위 배우)인 작품으로 연습 기간만 1년 가까이 소요됐다. 무대 위와 아래, 배우와 관객, 국적자와 이민자, 배우와 음악가 등 수많은 경계를 작품 안팎에서 허물고 있다. 2007년 개봉해 세계적으로 흥행한 인디영화 <원스>를 뮤지컬화 한 브로드웨이 공연의 창작자들이 내한해 한국 창작진들과 협업해 재해석한 한국형 <원스>다.
‘평생 배에서 내리지 않은 피아니스트’의 삶을 그린 <노베첸토>(알렉산드로 바리코 작·함영준 연출·김은영 음악·에밀 카펠루시 무대·이차분 안무·이주원 조명)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1999)의 무대 버전. 팀 투니를 비롯해 총 11개 역할을 하는 배우(오만석·주민진·유승현·강찬 분)와 재즈피아니스트(김여랑·조영훈 분)가 소통하며 이끌어가는 1인극 같은 2인극이다. ‘노베첸토’는 이탈리아어로 ‘1900’이라는 의미로 1900년 1월 1일 유럽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1등실 피아노 옆에 버려져 붙여진 이름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작점에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배에서 태어난 노베첸토는 태생적으로 경계인이다. 평생 단 한 번도 육지로 나가지 않고 배 안에서 살아간 천재 음악가라는 설정부터 비범하다. 뱃사람들에 의해 키워져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글과 음악도 본능처럼 자연스레 익혔다.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제도 밖의 인간 노베첸토에게 배는 유일한 실존의 공간이며 유한한 세상이다. 무한한 꿈과 상상력을 선객들에게 전하는 그의 삶이 재즈피아노 연주와 배우의 독특한 액팅과 안무로 감각된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같기도 하고 오선지 노트 같기도, 피아노 건반 같기도 한 무대예술은 소도구 활용에 따라 다양한 시공간으로 변해 관객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불안의 시간성 담은 무대 미학
노베첸토는 뱃사람들이 양육해 늦게나마 출생신고를 마치고 제도권 안에서 생을 마감했으나 연극 <생추어리 시티>(마티나 마이옥 작·유은주 번역·이오진 연출·송지인 무대·신동선 조명)의 청소년들은 불법 이민자로 불안 속에 살아야 했던 제도 밖 존재들이다. 1막은 세상에 단둘만 남은 것처럼 서로에게 안전지대가 됐던 역사를 마치 자궁 속 쌍둥이의 공생처럼 표현했다. 분 단위로 빠르게 바뀌는 80개 넘는 장면은 소녀 G(이주영 분)와 소년 B(김의태 분)가 공유한 불안과 초조의 층위와 깊이를 감정적으로 흡입하게 이끈다. 어머니의 귀화로 합법적인 이민자가 된 G는 B를 위해 위장 결혼을 제안하나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하면서 3년의 공백기를 갖는다. 이를 상징하는 무대 전환과정 또한 중요한 서사다. 빈 무대 위에 지붕을 쌓아 올리고 가구들을 들여놓는 장면은 B와 G의 성장과 주변 환경의 변화를 체험케 한다. 성소수자인 B는 G가 그리웠음에도 새로운 연인 헨리(아마르볼드 분)를 사귀고, 로스쿨 학생이기도 한 이민자 출신 헨리는 돌아온 G가 B의 영주권을 위해 불법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다. 경계인으로서 복잡하고 난감한 삶을 수용하며 살아내야 하는 각자의 사정은 한치의 동정이나 연민조차 거부한다. 어차피 냉혹한 현대 사회에서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안전지대(Sanctuary City)는 없음을 체감하며 그들은 각자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을 고민한다.
<라이카>(한정석 작·이선영 작곡·박소영 연출) 역시 존재론적인 고민과 입증의 재해석이다. 1957년 소련이 쏘아 올린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탑승견 라이카(박진주·김환희·나하나 분)의 실화에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의 캐릭터 왕자(조형균·윤나무·김성식 분)와 장미(서동진·진태화 분)를 융합한 판타지 서사다. 자신을 우주탐사견으로 훈련시킨 캐롤라인(한보라·백은혜 분)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는 라이카가 귀환 장치 없는 인공위성을 타고 어린 왕자의 별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왕자와 장미는 냉전 시대 우주전쟁의 소모품이었던 라이카에게 ‘개’가 아닌 ‘존재’라는 자의식을 심어준다. 자신을 우주 쓰레기로 방치한 캐롤라인에 대한 원망을 키우던 라이카는 왕자를 도와 지구 절멸 계획에 동참하지만, 결국 지구와 함께 ‘존재’들을 지켜낸다는 휴머니즘으로 마무리한다. 냉전 초기의 아날로그 우주선 배경에 몽환적인 조명디자인과 영상디자인으로 시대와 관습을 초월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을 선보인 작품이다. 장면 전환 때마다 등장하는 바오밥나무 앙상블의 군무는 뮤지컬 문법의 새로운 제안 같다. 비인간인 라이카의 인간다움은, 이후 계속된 우주개발로 무귀환 장치에 실려 우주에 보내진 수많은 지구 동물과의 연대로 마무리된다.
<원스>의 대표 넘버인 ‘폴링 슬롤리(falling slowly)’는 경계를 넘나들며 경계를 해체하는 지혜와 여유를 노래한다. 천천히 가라앉고 스며드는 시간성과 이에 따른 변화를 포괄한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에서, 무한한 음악을 만들어낸 노베첸토는 자신의 세상인 배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냈다. 소모되는 경계인에서 ‘존재’로 거듭난 라이카처럼 말이다. <생추어리 시티>와 <라이카>는 끝났고, 뮤지컬 <원스>는 5월 31일, <노베첸토>는 6월 8일까지 상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