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영드 ‘소년의 시간’, 살인자의 이해를 이해하기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2025.05.05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한 장면 / 넷플릭스 제공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한 장면 / 넷플릭스 제공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 전 세계 시청자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이 드라마를 학교의 공식 커리큘럼으로 사용하자는 논의를 조직하고 있다. 온라인 여성혐오(misogyny)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는 그곳에서도 큰 논쟁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넷플릭스 역대 시청 순위 5위에 올랐을 정도로 폭발적 반응을 만들어냈지만,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논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이 작품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스포일러가 무의미한 작품이지만, 그래도 혹시 걱정되는 독자가 있다면 아래 글을 읽기 전에 드라마를 먼저 보길 추천한다).

<소년의 시간>은 원 테이크로 촬영된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1편은 열세 살 소년 제이미가 집에서 체포되는 장면에서 시작돼 그가 케이티를 살인하는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경찰서의 공간 구성이다. 제이미는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극히 복잡한 절차를 수행하는데, 이는 모두 미성년자 피의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수사를 진행하기 위한 장치다. 이는 곧바로 병원 공간을 상기시킨다. 병원은 환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기관은 피의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복잡한 통제와 감시장치를 운영한다.

2편은 수사관의 시선을 따라 학교 현장을 보여주는데, 그곳은 괴롭힘과 조롱이 지배하는 난장판이다. 여기서 매노스피어(manosphere)나 인셀(incel) 같은 여성혐오적 하위문화가 10대의 집단문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편이 최고의 에피소드라는 데 시청자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극 중 임상 심리학자가 여러 번 말하듯이, 문제는 살인자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에피소드 마지막에 호흡 곤란이 오는 것은 심리학자만이 아니다. 제이미는 사악하고, 순진하고, 폭력적이고, 연약하고, 위선적이며, 심리학자가 그의 앞에서 경험하는 공포, 혐오, 죄책감, 호기심, 적대감 등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4편은 제이미의 가족, 특히 아버지 에디의 남성성에 집중한다. 관객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들이 ‘좋은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살인자의 가족이 져야 할 책임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가족에게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단순한 예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던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를 그토록 잔인하게 살인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제이미의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 매노스피어나 인셀이 거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진단만으로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제이미와 케이티 사이에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이 보여주듯, 여성혐오는 10대의 문화 그 자체가 됐다. 더구나 괴롭힘이 일상화된 학교와 SNS, 그곳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실행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아버지 에디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분노를 조절하는 방식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남성성도 고려해야 할 요인이다. 하지만 그가 사회의 ‘정상적’ 범위를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남성성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으며, 그것이 제이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진 않았는지 자문한다. 네 편의 에피소드는 매우 정교하고 계산된 방식으로 모든 종류의 단순한 대답을 회피한다. 여기에 이 작품의 탁월함이 있다.

어떤 맥락에서 볼 것인가?

한국의 윤리적 상황에서 이 작품은 꽤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피해자를 비추지 않고, 오로지 가해자와 주변 환경에만 시선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피해자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케이티라는 이름과 얼굴 사진 정도일 뿐, 자세한 정보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사건에 접근하는 일반적인 방식, 즉 피해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을 첫 번째 규칙으로 삼고, 가해자의 존재가 피해자의 존재를 은폐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한국에서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가 윤리적 규칙처럼 요구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의 편에서 피해자를 공격하는 흐름이 항상 등장한다. 이런 조건에서 가해자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봐야,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기 위한 도구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를 보지 않고 사건 전체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어떻게 공감이나 감정적 지지 없이 인간 대상을 이해할 것인지, 또한 그런 이해를 시도하기 위한 논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다.

언젠가부터 피해자-가해자는 한국의 사회적 폭력을 다루는 유일한 인식틀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의 핵심은 대립하는 두 진영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을 삭제한다는 데 있다. 그 후에는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폭력에 대한 유일한 응답으로 남는다. 이런 구도 내에서 피해자 혹은 가해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에 공감하고, 그의 편을 드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해의 다른 방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예컨대 지성을 이용해 인간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 타인의 심리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 생각과 생각의 상호 작용을 추적하는 것 등은 불가능하다. 인간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소년의 시간>은 피해자-가해자 도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한다. 그래서 3편의 심리학자 같은 인물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악인을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위로하는 작업과 분리돼 오로지 살인자의 이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인물이 과연 한국 드라마에 등장할 수 있을까? 혹은 가해자의 이해를 이해하는 작업이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답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 이런 논의를 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이 중요하다. 피해자-가해자 관계의 외부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 지금 우리가 고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 놓여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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