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하나 안 남았는데 사과 농사는 무슨···”

2025.04.21

의성·안동·청송 사과 주산지…묘목·저온창고 등 지난 산불에 전소

불에 탄 사과나무들 / 이호준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불에 탄 사과나무들 / 이호준 기자

“저기 있는 거(나무) 한 개도 못씁니다. 멀쩡한 거 같아도 싹 다 죽었어요.”

배방천을 거슬러 내배방마을로 가던 길에서 만난 한 주민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집 앞 타다 남은 잔해들을 그러모으던 그는 ‘피해가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호미 한 개 안 남았는데 사과 농사는 무슨…”이라며 혀를 찼다.

경북 안동. 계명산 자락 배방저수지를 출발해 배방천을 따라 길게 자리 잡은 배방마을은 4개 부락 50여 가구로 이뤄진 작은 마을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담배 농사를 주로 지었지만, 부락 전체가 벌이가 더 나은 사과 농사로 갈아타면서 안동에서도 사과가 많이 나기로 소문난 마을이다.

지난 4월 8일 배방마을에서 만난 주민 김경대씨(69)는 “좀 있으면 꽃이 펴야 하는데 아직 이파리 한 개가 안 난다. 이게 착과가 될지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무들이 전부 누렇게 변했는데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불이 넘어온 날, 배방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양 기슭에서 불이 쏟아져 내려왔다. 산기슭에 접한 나무들은 통째로 숯이 됐고, 바람을 타고 불이 날고 열풍이 몰아치면서 가운데 있던 나무들도 불을 먹었다고 했다.

창고에 저장 중이던 사과들이 불에 탄 채 밭으로 쏟아져 나와 있다. 이호준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창고에 저장 중이던 사과들이 불에 탄 채 밭으로 쏟아져 나와 있다. 이호준 기자

금사과 대란 재현되나

그는 “집에서 먹을 사과 몇 알 빼내고 창고고 뭐고 싹 다 날아갔다”며 “(가을에 사과 가격이) 어떻게 될지 감도 안 온다”고 말했다.

영남을 덮친 초대형 산불이 꺼진 지 열흘이 넘었지만, 안동은 여전히 메케한 탄내에 갇혀 있었다. 봄을 맞아 파릇하게 오른 새순 덕에 시커먼 참상이 조금 가려지기는 했지만, 산이고 들이고 건물이고 성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산불 피해가 특히 컸던 길안면에는 온전한 건물이 몇 채 없었다. 산에 맞닿아 지어진 마을들은 통째로 잿더미로 변했고, 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도로를 따라 지어진 값비싼 저온창고들도 폭격을 맞은 듯 찢겨 앙상한 철골만 남아 있었다.

‘ㅅ’사과농장의 김시열씨(71)는 “불을 막는다고 (농장) 옆이랑 뒤에 산까지 다 쳐냈는데, 대피했다가 돌아오니 개울도 넘어서 불이 앞으로 들이쳤더라”며 황망해했다. 김씨는 “불이 개울 쪽에서 올 줄 모르고 기계랑 장비를 앞에 다 숨겼는데 그게 홀라당 다 타버렸다”며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김씨의 집 앞 녹아내린 비닐하우스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타버린 기계 여러대가 방치돼 있었다. 농기계임대사업소에서 무상으로 농기계를 빌려준다는 현수막이 마을 곳곳에 걸려 있었지만 기약이 없다고 했다. 1억원을 주고 4년 전에 세운 저온창고도 불이 붙어 고장이 나버렸다.

지난해 18㎏ 기준으로 사과 3500상자를 출하한 그는 올해는 그 7할이나 출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엊그제 (재해보험) 보험사 직원이 다녀갔는데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돌아갔다”며 “얼마가 나올지도 걱정이지만, 묘목 특약을 안 한 집은 보험금이 한 푼도 안 나올 건데 그것도 참 보통 일이 아니다”고 걱정했다.

지난 3월 21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불은 강풍을 타고 동해로 뻗치며 경북 인근 11개 시·군으로 번졌다. 이번 산불로 인한 농작물 피해는 지난 4월 9일 기준 여의도 면적의 12배에 해당하는 3862㏊(1㏊는 1만㎡)로 추산됐다.

이번 화마의 직격탄을 맞은 경북 지역은 국내 대표 사과 주산지다.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등 5개 시·군의 사과 생산량은 2023년 기준 전국 사과 생산량의 37.8%로 40%에 육박한다. 경북 도청에 따르면 의성과 안동에서만 각각 1835㏊, 1095㏊의 피해신고가 들어오는 등 경북 지역 과수원 3701㏊(잠정)가 불에 탔다. 이는 지난해 전국 사과 재배면적의 11.1%에 해당한다. 피해신고 기준으로만 따지자면 사과 10상자 중 1상자꼴로 재배지가 피해를 입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산불로 인한 막대한 농가 피해는 물론, 2023년 사과 대란 재현 등 먹거리 물가 상승이 크게 우려되고 있는 이유다.

지난 4월 8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마을공동창고가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이호준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지난 4월 8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마을공동창고가 전소된 채 방치돼 있다. 이호준 기자

경북 안동시 길안면 구수1리 마을창고 안에서 불에 녹아내린 농기계들 / 이호준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경북 안동시 길안면 구수1리 마을창고 안에서 불에 녹아내린 농기계들 / 이호준 기자

정부에서는 산불로 인한 피해신고 지역 중 불에 직접 탄 피해면적은 제한적인 만큼 개화가 이뤄질 때까지 수급 영향을 예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라도 ‘불을 먹은’ 나무들은 개화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게 현장의 중론이다. “전문가들이 와서 봐야지 (정부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농식품부는 이달 중순이 지나 꽃이 피면 정확한 수급 영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가 아니라 앞으로 5년이 걱정”

의성·안동과 함께 대표적인 사과 주산지인 청송의 피해도 컸다. 청송군 내에서도 특히 피해가 컸던 진보면 후평2리 한길마을에선 마을을 오가는 사이 단 한 명의 주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골짜기 개울을 따라 늘어선 과수 농가 중 화마를 피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과수밭은 돌보지 않은 지 꽤 지난 듯 바짝 말라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어두운 시간도 지나갑니다. 희망을 품고 청송군과 함께 이겨냅시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만 덩그러니 내걸려 있었다.

한길마을에서 멀지 않은 후평2리 신법마을 비상대피소에서 만난 한 주민은 “여기도 난리 났지만, (한길은) 마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10년 전 서울에서 이사 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는 “오늘 정부에서 얼마씩 준다고 얘기한 걸 들었는데 뭘 알고 하는 소린가 싶었다”면서 “올해가 아니라 적어도 앞으로 5년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3000평에 800만원인가를 준다고 하는데 그건 묘목값도 안 된다”며 “보상금 받아 올해 넘기고 나면 내년부터는 뭘 먹고 사냐”고 강조했다. 그는 “나무들이 싹 다 타버렸는데 묘목 심어서 수확하려면 또 5년 기다려야 한다”면서 “지금 20㎏ 한 박스 8만원인데 가을에는 30만원 가는 거 아니냐고들 얘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5년 후도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집이고 뭐고 다 탔는데 정부에서 집 한 채당 3600만원인가 준다고 한다. 그걸로 몇 평이나 집을 새로 지을 수 있겠냐”며 “앞으로 누가 마을에 들어와서 집을 짓고, 사과 농사를 다시 지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호준 기자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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