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혐의로 수사를 받던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의 죽음은 여러모로 5년 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3선 의원 출신으로 여권 내에서도 친윤석열계 핵심 실세로 꼽히던 장 전 의원은 약 10년 전 부산의 한 대학 부총장 시절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됐죠. 경찰에 출석해서도 줄곧 혐의를 부인한 그는 피해자가 증거를 공개하고 기자회견 일정을 잡자 사망했습니다. 서울시장을 세 번이나 지내며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받던 박 전 시장 역시 부하 직원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이틀 뒤 숨진 채 발견됐죠. 박 전 시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완주 전 의원, 장 전 의원까지 모두 자신의 비서나 보좌관, 부하 직원을 성범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죠. 장 전 의원을 고소한 여성은 2018년 미투 운동(MeToo·나는 고발한다)이 확산했을 당시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운 마음에 참고 인내할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 다독였다고 합니다.
미국 영화 시장의 거물이었던 하비 와인스타인의 수십 년에 걸친 성범죄를 추적하는 내용의 영화 <그녀가 말했다>를 보면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것을 꺼립니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시스템이 이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든 것이죠. 10년 가까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용기를 내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장 전 의원의 죽음으로 피해자는 가해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울 기회마저 잃게 됐습니다. 가해자가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도피함으로써 수사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겠죠. 피해자에게 사과 한마디 남기지 않은 장 전 의원의 죽음에 대해 국민의힘에선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는커녕 추모와 동정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공식 논평 한 줄 나오지 않네요.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도피한 장 전 의원의 선택은 정말 비겁했다고 한다면 과한 얘기일까요. 피해자가 2차 가해로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주 주간경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폭주하는 미국으로 인해,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로 내몰린 시민들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으로 기업들이 미국으로 공장을 돌리면서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과 거액의 관세를 물게 된 국내 중소 수출기업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변동성 높아진 금융시장에서 조금이라도 수익을 내보겠다며 매일 ‘오징어 게임’ 같은 생활을 감내하는 투자자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 변화로 혼란을 겪고 있는 투자이민 시장 상황도 짚어봤습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여한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위원을 만나 트럼프 시대의 통상 질서 변화와 전망에 대한 의견도 들어봤습니다.
<이주영 편집장 young78@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