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생체시계 유전자와 검은 롱패딩

김우재 낯선 과학자
2025.01.26

OpenAI의 DALL·E를 사용해 생성한 이미지 /OpenAI 제공

OpenAI의 DALL·E를 사용해 생성한 이미지 /OpenAI 제공

초파리로 시작된 연구에 노벨상이 주어진 건 여섯 번뿐이다. 초파리에게 6번이나 노벨생리의학상이 주어졌느냐고 놀랄지 모르지만, 1933년 초파리를 이용한 유전법칙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토머스 헌트 모건의 초파리 유전학은 20세기 초 유럽과 비교해 과학기술 후진국이던 미국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과학 분야 중 하나였다. 초파리 유전학은 이후에도 미국식 과학의 상징이자 대표주자로 20세기 중반 전성기를 구가했고, 여전히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 등의 최첨단 연구소에서 주목받는 생물학의 대표적인 모델생물이다. 여섯 번의 초파리 노벨상 중 마지막은 2017년 24시간 주기의 생체시계를 연구한 초파리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초파리의 생체리듬과 유전자, 혁명의 시작

1970년대 초반, 박테리오파지 연구로 이미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모어 벤저는 스승 델브뤽의 권유로 새로운 학문을 창시한다. 훗날 ‘행동유전학’이라 불리게 된 이 분야의 주인공은 초파리였고 벤저는 초파리를 이용해 유전자가 어떻게 행동을 조절하는지를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고른 행동은 초파리의 주광성, 즉 빛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이었고 20세기 초반부터 잘 구축돼 있던 초파리 고전 유전학의 돌연변이들이 벤저의 행동분석을 유전자 관점에서 해석하는 무기가 돼주었다. 그렇게 행동유전학은 유전자와 행동이라는 당시로써는 멀고 먼 두 개념을 연결하며 세상에 등장했다.

코노프카는 벤저의 첫 학생이었고, 24시간 주기로 살아가는 생물의 생체리듬에 관심이 많았다. 자외선을 쪼여 돌연변이 초파리를 잔뜩 만들어 두고 코노프카는 매일 새벽 실험실에 나와 번데기에서 성체로 태어나는 초파리들을 관찰하며 박사과정 초반을 보냈다. 어느 날 약 200번째 돌연변이 초파리에게서 ‘새벽에 제대로 태어나지 않는 특성’을 발견한 코노프카는 이 돌연변이에 ‘주기(period·per)’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유전자 ‘per’는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생체시계 조절 유전자가 됐다.

하나의 유전자가 밝혀지고 나자 그다음은 쉬웠다. 벤저의 실험실은 갑자기 생체시계 유전자를 찾아 헤매는 연구원으로 가득 찼고, 몇 해 되지 않아 ‘시간초월(Timeless)’, ‘시계(Clock)’, ‘순환(cycle)’ 등의 생체시계 유전자들이 클로닝(cloning·같거나 거의 같은 DNA를 가진 개체를 여러 개 만들어 내는 것) 된다. 1970년대 초파리에서 성공적으로 시작된 생체시계 유전학 연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쥐유전학과 식물유전학 분야 등으로 넘어갔고, 놀랍게도 대부분 유전자가 진화적으로 보존돼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초파리의 생체리듬을 조절하는 유전자는 인간의 생체리듬도 조절한다는 것이다. 초파리에서 밝혀낸 유전자가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 동물에서도 생체리듬을 조절한다는 사실은 초파리 유전학의 쓸모를 주장하고 증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아이비리그의 초파리 기득권과 양극화

초파리 생체시계의 성공으로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연구자가 이 분야에 뛰어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저 그런 연구 성과들이 출판되는 현실에 이르렀다. 그러자 연구자들은 생체시계 유전자의 다른 기능에도 관심을 두게 된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 이르면 생체시계 유전자들이 단지 생체리듬의 조절에만 관련이 있는 게 아니라 코카인이라는 마약에 대한 민감도 역시 조절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둑의 한쪽이 무너지자 봇물 터지듯 다양한 보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생체리듬 연구라는 주제 안에서는 완벽하게 설명되던 생체시계 유전자들의 기능이 다른 행동과 생리현상에 적용되기 시작하자 모순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몇몇 생체시계 유전자 돌연변이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이 어떤 생체시계 유전자 돌연변이에선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노벨상과 교과서에 실린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 너무나 많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생체시계 유전자 중 일부는 기억 현상에도 중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걸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또한 생체시계 유전자 중 하나는 수컷 초파리의 날갯짓 빈도 역시 조절한다고 보고가 됐는데, 이 현상을 두고 기존의 생체시계 연구자들과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어느 분야나 기득권이 나타나면 양극화가 시작된다. 생체시계 분야도 그랬다. 모건이 자리를 잡았던 컬럼비아대학을 중심으로 미국 아이비리그가 생체시계 연구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거대한 우월의식이 나타났고, 생체시계 연구는 이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거쳐야만 좋은 학술지에 실리게 되는 관행이 생겨났다. 2000년대에 이르면 초파리 생체시계 연구는 고루한 분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미국 아이비리그의 몇몇 실험실이 대부분 학술지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연명해 나갔다. 1974년에 시작된 혁명은 노벨상이 주어지던 2017년엔 고루한 과학이 돼 있었다.

실제로 노벨상이 주어지는 분야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자연과학의 측면에서 보면 대부분 낡아빠진 분야이기 십상이다. 과학의 이론이 교과서에 실려 있다면 현장 연구자의 관점에서 그 이론은 이미 지루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과서적 지식을 가지고 과학 대중화를 운운하는 엔터테이너 대부분은 실제 과학연구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가짜 과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연구를 모른다. 오직 유행만을 좇을 뿐이다.

검은 롱패딩과 한국적 과학

과학의 한 분야가 성공적인 결과를 내기 시작하면, 유행과 연구비를 좇아 수많은 과학자가 해당 분야로 몰려든다. 이런 현상은 유행하는 옷을 따라 입는 현상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어느 겨울 한국인의 대부분이 검은 롱패딩을 입고 있는 현상과 유행하는 과학을 따르는 과학자들의 심리는 유사하다. 과학의 제도를 조율하는 행정관료들이 똑똑하다면 이런 유행이 가진 장단점을 모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유행에 가장 민감한 나라는 한국이다. 검은 롱패딩처럼 한국의 행정관료들은 유행하는 과학에 목숨을 건다. 예를 들어 얼마 전부터 비만치료제로 주목을 받는 GLP-1이 유행한 이후로 한국 연구비는 GLP-1과 관련된 과제에 쏠리게 된다. 이런 일의 반복은 영원히 한국의 과학을 패스트 팔로워 수준에 고정한다.

코노프카와 벤저가 생체시계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대부분 과학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혁명은 대부분 그런 무시를 받는 분야에서 일어난다. 유행만 잘 따라가면 살아남는 과학자들이 다수인 곳에서, 혁명은 시작조차 될 수 없다. 과학혁명은 외로움을 먹고 자란다. 원래 그렇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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