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대통령 관저 옛 주인은 해병대…굴곡진 역사 껴안은 땅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
2025.01.26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체포영장 집행이 임박한 지난 1월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적막이 감돌고 있다. 성동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체포영장 집행이 임박한 지난 1월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적막이 감돌고 있다. 성동훈 기자

12·3 비상계엄 사태로 내란수괴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이 경호처를 방패막이로 농성을 벌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는 원래 해병대 땅이었다. 과거 12·12 군사반란 당시 이곳은 해병대 공관 경비대가 전두환 신군부 반란에 맞선 장소다.

해병대 출신인 여석주 전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지난 1월 15일 국회 토론회에서 “한남동 땅은 6·25전쟁 후반, 장단 사천강 일대를 방어하던 해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해병대 직할부대가 배치됐던 곳이고, 인천상륙작전과 도솔산 전투를 기억하는 국민의 모금으로 해병대 사령관의 첫 공관을 지었던 자리였다”며 “해병대 대위였던 저의 선친이 그곳에서 결혼식을 했고, 그 인연으로 선친, 친형, 저 세 사람이 해병대 군복을 입고 보낸 햇수가 도합 90년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병대의 역사와 피눈물이 어우러진 한남동 일대에서 벌어지는 혼돈과 추태에 전우분들 모두 분노와 비통을 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밤의 ‘정부 1번지’

대통령 관저가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땅은 공관촌이다. 입법·사법·행정 3부 수장의 거처가 모두 모여 있는 밤의 ‘정부 1번지’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에 있던 국회의장·대법원장 공관에 더해 현 외교부 장관 공관이 대통령 관저로 바뀌었다. 3부 수장의 관저·공관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명실상부한 ‘한남동 관저·공관 타운’이 형성됐다. ‘관저’라는 명칭은 대통령이 사는 곳에 주로 사용한다. 한남동 공관촌에는 3부 수장 공관뿐만 아니라 국방부 장관, 합동참모의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대통령실 경호처장 공관 등도 자리 잡고 있다. 모두 8개 공관이 모여 있는 곳이다.

매봉산 서쪽 자락에 있는 이 공관촌의 원래 주인은 해병대다.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까지 포함해 한남동 공관촌을 지키는 공관 경비대가 해병대 병력으로 이뤄졌던 것도 이런 인연에서다.

해병 원로들에 따르면 해병대는 한국전쟁 후반 한남동 농림부 땅을 불하받아 해병대 직할부대인 본부대대와 수송대 등 지원 시설 등을 배치했다. 해병대 사령관 공관도 들어섰다. 사령관 공관은 한남동 뒷산이 남산 자락으로 이어지면서 당시 해병대사령부가 있던 용산 쪽으로 연결됐다.

1962년 세워진 해병대 사령관의 한남동 공관은 건축 전체면적이 612㎡, 대지 면적이 9772㎡인 2층 양옥 건물이다. 해병대 사령관 공관은 해병대사령부가 경기도 화성으로 이전하면서 논란이 됐다. 화성 덕산대에도 해병대 사령관 공관이 있어 서울 한남동 공관은 서울에 거주하는 사령관 자녀들의 통학용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명박 정부 때는 국방부가 해병대 사령관의 한남동 공관을 통일부 장관 공관으로 전용하려고 시도했다.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구성원인 외교·안보 부처 장관 가운데 통일부 장관만 공관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청와대에서 국가비상사태로 인한 NSC 회의 소집 시 국방·외교 장관은 청와대에서 6㎞ 떨어진 한남동 공관에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통일부 장관은 그리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해병대 사령관 공관의 통일부 장관 공관으로의 전용 방안은 해병대 원로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공정식 6대 해병대 사령관을 포함한 예비역 해병 장성들은 한남동 땅에 깃든 해병대의 역사성 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연판장을 청와대에 전달했고, 국방부는 계획을 철회했다.

이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외교부 장관 공관이 대통령 관저가 됐고, 대통령실이 관저 남서쪽에서 도보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있던 해병대 사령관 공관을 경호처장 공관으로 사용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해병대 사령관 공관은 대통령실 경호처가 일시 사용한다는 개념으로 가져가 경호처장 공관이 됐다.

지난 1월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경호처 관계자들이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지난 1월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경호처 관계자들이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기념관과 초대교회

해병대의 굴곡진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곳은 또 있다. 해병대 중앙기념관과 해병대 초대교회가 그곳이다. 이 두 시설은 서울 용산구 용산로 2가(후암동)로 옛 방위사업청 터에 있다. 이 시설들이 해병대 부대 인근이 아니라 동떨어진 서울 시내에 있는 사연은 해병대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됐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규모가 커졌다. 그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의 베트남 파병이 끝난 후 1973년 10월 10일부로 해병대사령부를 해체했다. 전투부대는 해군의 상륙전 부대로 예속되고 해병대사령부를 비롯한 교육 및 지원부대는 해체됐다.

해병대사령부 건물이 있던 터에는 국방부 조달본부가 들어섰고, 방위사업청이 개청하면서 청사 건물이 됐다. 이후 방사청이 대전으로 내려갔고, 이곳은 용산공원 조성 대상에 포함됐다.

1975년 4월 15일 개관한 해병대기념관은 해병대사령부 제2 연병장 자리에 세워졌다. 1000평의 대지 위에 200여평의 2층 건물이다. 1층에는 역대 사령관 기념물 전시실과 관리실이 있고, 2층에는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과 해병대의 발전상을 상징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다.

해병대 최고 지휘부인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해병대 중앙기념관이 건립됐다. 모군이 활약하던 시기가 아니라 해체된 후에 만들어진 특이한 경우다. 기념관은 대통령 하사금 2000만원과 베트남전 참전 용사 등 해병대 장교의 성금 2400만원을 기금으로 1975년 4월 15일 2층 규모로 개관했다.

기념관은 건립 이후 외부 기관의 끊임없는 이전 요구에 시달렸지만, 해병대 측은 “다른 곳에 갈 바에야 없애는 것이 낫다”고 버텨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병대 예비역들은 기념관이 옛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는 쓰라린 기억을 지닌 곳으로, 해병대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해병대 초대교회는 해방촌 군인아파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래된 화강암과 담쟁이덩굴, 벽돌로 쌓아 올린 기둥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초대교회는 1951년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처음 창립된 후 해병대사령부·전투부대와 함께 진해·부산을 거쳐 1955년 서울 남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959년 해병대사령부 용지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지금의 건물로 준공됐다. 예배당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십자가는 1951년 해병대 1연대가 북한군에 맞서 혈전 끝에 탈환한 강원 양구군 도솔산의 고로쇠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대교회는 19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면서 교회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2003년 해병대 창설 제54주년을 기념해 변형된 교회 건물을 예배당으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명칭을 회복했고, 2017년 2월 15일 대한민국의 국가 등록문화재 제674호로 지정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당시 해병대의 완전한 독립을 통한 육·해·공군 해병대의 4군 체제를 공약했다. 해병대 사령관의 4성 장군 진급과 해병대회관 건립도 약속했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 사태로 해병대가 수십 년간 열망해왔던 해병대 독립은 당분간 물 건너간 모양새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 anbo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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