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계에서는 배신이나 배반이라 할지 모르지만, 정이삭 감독은 <트위스터스>로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감독으로서 훌륭히 신고식을 치렀다. 앞으로도 장르 불문하고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길.
제목: 트위스터스(Twisters)
제작연도: 2024
제작국: 미국
장르: 액션, 모험, 드라마
감독: 정이삭
출연: 데이지 에드가 존스, 글렌 파월, 안소니 라모스
개봉: 2024년 8월 14일
상영시간: 122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트위스터>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1996년 여름도 지금처럼 푹푹 찌는 날씨였고, 영화를 보면서 살짝 한기를 느꼈다. 그건 영화가 던지는 시각적 자극에 기인한 걸까 아니면 영화관에 설치된 대형에어컨 바람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궁금하다.
1996년엔 필자도 인터넷을 썼지만, 그건 PC였다. 지금처럼 모바일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대가 아니다. SNS도 없었다. 지금처럼 차에 탄 모든 사람이 고개를 처박고 각자의 세계에 몰두하던 시대가 아니다. 아직 아날로그가 의미 있던 때.
결국 속편이 나왔다. 28년 만이다. 그동안 몇 차례 <트위스터> 속편 제작 소식이 있었지만, 번번이 엎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메가폰을 잡은 감독은 다름이 아닌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이었다.
28년 전 <트위스터>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
몇몇 외지의 주연배우나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니 <트위스터스>는 <트위스터>와는 구별되는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걸 강조하는데, 영화에는 전작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장치가 숨겨져 있다.
우선 도로시. <트위스터>의 이혼 위기에 놓인 기상학자 부부 빌과 조가 개발한 트위스터 관측장비 이름이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소녀 도로시로 명명돼 있었다. <트위스터>에서 도로시는 1호부터 4호까지 제작됐는데 28년 만에 ‘s’ 자만 더한 이 속편 영화 속 관측장비엔 그때처럼 배우 주디 갈랜드(1939년 개봉한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를 연기했다)의 컬러 사진이 로고처럼 붙어 있었고, 이들이 처음 날린 장비는 5호기다. 그러니까 토네이도 연구는 빌과 조 이후에 오랫동안 뒤를 이은 사람이 없었던 걸까.
이번 영화에서 토네이도 내부 관측을 위해 날려 보내는 작은 플라스틱 공(초등학교 앞 문구점에 있는 ‘뽑기 기계’에서 나오는 캡슐처럼 생겼다)에 다는 ‘날개’도 28년 전 영화에서 빌과 조 부부가 먼저 고안했다. 이들은 빈 알루미늄 캔을 모아 펴서 만든 날개를 임시방편으로 공에 달았다.
서사 구조도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트위스터>의 시작 장면에서 최상위 등급인 EF5급 토네이도에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조가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어 토네이도 연구에 매진했다면, <트위스터스>의 시작 장면에서 여성 과학자 케이트는 ‘기저귀에 들어가는 화학물질을 활용해 대기의 수분을 흡수한다면 토네이도의 급작스러운 등장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토네이도 출몰 현장에 나간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을 잃은 케이트는 트라우마를 안고 현장을 떠나 뉴욕 기상청 사무실에서 데이터만 다루는 사무직이 된다. <트위스터>에서 현장을 떠난 건 남편 빌이었다.
<트위스터>가 빌과 조, 현장 연구엔 무지한 심리상담 박사의 삼각관계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았듯이 <트위스터스>에서는 케빈과 과거 동료를 잃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하비(안소니 라모스 분), 100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 운영자이자 독립과학자인 타일러(글렌 파웰 분)가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독립영화 출신 감독의 블록버스터
토네이도를 유튜브에 생중계하기 위한 장비로 무장한 타일러의 빨간 픽업트럭도 있다. <트위스터>를 본 사람이라면 빌이 몰던 빨간 오프로드 트럭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이 삼각관계에서 최종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는 이미 예정돼 있다).
거기에 케이트는 영화 중반에 이르면 <트위스터>에서 조가 입었던 민소매 운동복과 흡사한 옷을 입고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트위스터>가 ‘독립과학자 vs 아이디어를 훔쳐 거대기업의 후원을 받은 악당 과학자’의 구도를 이야기 전개의 동력으로 사용한다면 <트위스터스>는 그 구도를 바탕으로 더 미묘하고 심화한 대립 축을 제시하고 있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완전히 절연해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니까.
어쩌면 이것은 독립영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연출을 선택하면서 내놓은 자기변명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독립영화계에서는 배신이나 배반이라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경우를 여럿 알고 있다.
소수 장르팬만 열광하던 1980년대 <이블 데드> 시리즈의 샘 레이미 감독이 2000년대 <스파이더맨> 3부작을 만들 것이라는 걸 그 당시 누가 알았겠는가. 뉴질랜드에서 동네 친구들과 짓궂은 농담이 가득한 독립 슬래셔 영화 <고무 인간의 최후>(Bad Taste·1987)를 찍던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연출하게 될 거라는 것도.
정 감독은 이 영화로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감독으로서 신고식은 훌륭히 치렀다. 앞으로도 장르 불문하고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길….
헬렌 헌트는 왜 <트위스터스>에 출연하지 않았을까
<트위스터스> 제작진들은 영화가 단순 리부트가 아닌 오리지널 창작이라고 강조하는데, 보통 이런 경우 전작의 주연급 인사를 카메오라도 등장시키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트위스터>에서 주연 빌 하딩을 맡은 빌 팩스톤은 2017년 심장판막에 이상이 생겨 수술받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61세.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조 역을 맡았던 헬렌 헌트(사진)다.
<트위스터>에서 토네이도를 쫓던 빌과 조 팀이 근처에 살던 이모 집을 방문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트위스터스>에서는 동료들을 잃는 사건 후 고향마을을 떠난 케빈이 현장에 딱 1주일 돌아와 온갖 고생과 좌절을 겪다 수년 만에 홀로 농장일을 하며 사는 엄마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토네이도에 대한 케이트의 ‘감각’은 <트위스터>의 빌처럼 발달했는데, 자연스레 케이트는 현업에서 은퇴했을 조와 빌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깜짝 등장하는 케이트의 어머니가 ‘알고 보니’ 이제는 나이 먹은 <트위스터>의 조, 헬렌 헌트이지 않을까는 기대를 관객들이 품도록 영화는 유도한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혹시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그런 구도를 넣었다가 캐스팅에서 실패하면서 고친 게 아닐까.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니 또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트위스터>에서 이혼 위기를 극복한 빌과 조 부부가 그 뒤 과학계에서 잘나갔다면 케빈의 어머니처럼 시골에서 소를 키우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감독은 반문했다. 헬렌 헌트 캐스팅에 실패한 것을 둘러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헬렌 헌트는 아직도 활발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지난 7월 17일 미국에서 개봉해 현재까지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트위스터스>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아직 하진 않고 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