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 들어 미국의 대통령선거 관련 뉴스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총격을 당했지만 살아남았고, 민주당은 후보를 조 바이든 대통령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으로 교체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민과 낙태, 기후변화 대응, 총기 규제, 사회보장 등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미국 제조업을 부흥하기 위한 산업정책, 통상정책은 대체로 궤를 같이한다. 다만 트럼프가 재선되면 미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 중심의 외교정책을 더 강하게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든 정부가 시행한 정책을 뒤집을 수도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관세 폭탄을 예고한 상태다.
혼란스러운 미국의 대선 과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선도해온 미국의 국제정치 리더십이 쇠퇴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국내정치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각을 세우지만, 보호주의 무역을 추진하고 미국 내 산업 육성을 우선시하는 데에서는 양당이 거의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의 지배에 의한 세계 평화)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혼란스러운 대선, 미 국제 리더십 쇠퇴 방증”
선진국 정치·경제 지형에서 미국이 두드러진 점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없고 경제적으로는 소득재분배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드러진다고 한 것은 유럽 선진국에 비교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유럽 선진국에는 영국의 노동당이나 독일의 사회민주당 등 사회주의적 가치를 표방하는 정당이 있고 정권을 잡기도 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1901년 창당된 미국사회당이 1972년에 해체됐다. 자신을 민주사회주의자라고 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201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최종 지명을 받지는 못했다. 민주당·공화당 양당에 경합할 정도의 사회주의 정당은 미국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 앞선 칼럼(곱씹어볼 스웨덴의 인구정책 실험)에서 보았듯 스웨덴이 선도한 복지국가 모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유럽국가가 실행하고 있다.
미국은 1930년대 뉴딜정책이 가장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국가가 경제에 깊이 관여했지만, 그 이후의 경제 정책은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정치·경제 지형에서 미국이 유럽과 다르다는 사실을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 부르기도 한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라는 저서를 1906년에 출판했다. 좀바르트는 책을 통해 미국 노동자들은 경제적으로 독일 노동자에 비해 훨씬 더 윤택하게 잘살고 있고, 여러 인종으로 구분된 사회 구성은 노동자의 계급의식 발달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1976년 이 책의 영어번역이 출판되자 학계에서는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논의가 다시 촉발됐다. 미국은 봉건주의라는 과거 역사가 없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나선 초기 이민자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계급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이 약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경제적 요인으로는 미국이 서부 등 변경 개척으로 새로운 기회를 계속 만들어나갈 수 있어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사회의 하위계층도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고, 소득분배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극단의 시대>에서 냉전 시기에 미국의 정체성은 ‘사실상 공산주의의 정반대로 정의됐다’고 했다. 이런 배경에서는 정치적 가치로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정책은 수용될 수 없었다.
미국 예외주의가 가능했던, 그리고 여전히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달러의 힘’이다. 미국의 달러는 국제 경제 거래에서 기축통화의 역할을 하고 있고, 국제 경제 관계에서는 준비통화의 역할을 맡고 있다. 1870년대에 경제 규모에서 미국이 영국을 능가했지만,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국의 파운드화는 국제 거래에서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브레턴우즈 체제가 정착하면서 미국의 달러가 기축통화로 영국의 파운드화를 대체했다. 준비통화로서 미국 달러는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국제거래에서 기축통화로 자리하고 있다. 유로와 엔화 그리고 중국 위안화가 있지만, 달러에 비하면 비중이 작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4년 1분기 세계 외환보유액은 12조3500억달러에 달한다. 이들 보유액의 54.8%는 미국 달러다. 18.3%는 유로로, 5.3%는 일본 엔화로, 4.6%는 영국 파운드화로, 그리고 2.0%는 중국 위안화로 구성돼 있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3조2200억달러로 세계 최대 규모다. 중국은 외환보유액의 약 60%는 달러로, 20%는 유로로, 나머지는 엔화 등으로 보유한다. 중국은 2조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2조달러 중 약 8000억달러는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로 갖고 있다.
“달러의 힘, 미국 예외주의 가능하게 만들어”
미국이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견디면서도 고소득과 고소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달러를 발행하고, 교역상대국은 수지 흑자를 달러 자산 외환보유고 형태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을 교정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 교역 상대국이 환율을 절상하고 미국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미국 경제가 더 강해져서 세계 경제에 더 압도적인 위상을 차지해 달러가 계속 가장 강력한 기축통화와 준비통화로 역할을 하는 것이 두 번째다.
교역상대국의 환율 절상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지만, 두 번째 옵션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세계 경제에서 미국 경제의 위상은 지속해서 하락해왔고 현상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미국의 역할을 대체할 나라가 등장하긴 어렵긴 하다. 그러나 시간은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유로와 위안화 등 다른 통화들이 미국 달러의 위상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에서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한다는 트럼프 선거 캠프의 구호는 공허하게 들린다. 마찬가지로 현재 바이든 정부의 정책 기조는 궁색해 보인다. 미국이 잘나가던 시기에 견지해온 세계 경제를 키우면서 미국 경제를 강화한다는 글로벌리즘(세계화)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미국이 선도해온 팍스 아메리카나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미국 대통령선거 이후의 세계는 누가 당선되든 각자도생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더 큰 혼란에 대비해야 한다.
<서중해 경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