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은 문 닫는데…원생들은 왜 떠나지 않나

2024.07.08

‘21세기 쪽방’ 21세기고시원, 주거복지 최전방서 들여다본 복지행정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21세기고시원. 이름엔 고시원이 붙었지만 서울시가 지정한 쪽방이다. 건물주는 지난 5월 25일 철거 및 리모델링을 이유로 입주민들에게 6월 20일까지 퇴거하라고 통보했다. 약 30명의 주민 중 절반가량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살 곳을 찾아 떠났다. 지난 6월 24일 고시원에 남아 있는 주민들이 발코니에 빨래를 널어놨다. 이효상 기자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21세기고시원. 이름엔 고시원이 붙었지만 서울시가 지정한 쪽방이다. 건물주는 지난 5월 25일 철거 및 리모델링을 이유로 입주민들에게 6월 20일까지 퇴거하라고 통보했다. 약 30명의 주민 중 절반가량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살 곳을 찾아 떠났다. 지난 6월 24일 고시원에 남아 있는 주민들이 발코니에 빨래를 널어놨다. 이효상 기자

지난 6월 24일 오후, 70대 여성 A씨는 서울 중구 회현동 21세기고시원의 비좁은 복도에서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있었다. 이삿짐을 미리 빼는 중이라고 했다. 이사를 하는 날은 6월 30일인데 이사 갈 방이 마침 비어 있어 짐을 미리 옮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사 비용을 아끼려면 지금부터 하나씩 세간살이를 옮겨야 한다.

A씨는 6년을 살던 이 고시원에서 쫓겨나는 중이다. 지난 5월 25일 건물주는 ‘건물 철거 및 리모델링’을 이유로 올해 6월 20일까지 방을 비우라는 공지문을 고시원 내에 붙였다. 공지한 퇴거일 이후로는 전기, 수도, 가스 공급을 중단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뜯어보면 문제가 많은 공지였다. 공지문에는 퇴거 예정 기간이 5월 18일부터 6월 20일까지로 적혀 있지만, 실제 공지문은 5월 25일에야 붙었다. 입주민에게 퇴거까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을 준 건 법을 떠나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건물주가 정말로 단전·단수를 감행한다면 형사적으로도 책임을 질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A씨는 떠나기로 했다. “내 집처럼 살았지만 내 집도 아니니까. 버텨야 소용없으니 나가야죠.” 퇴거 통보 후 한 달, 절반에 가까운 주민들이 A씨처럼 떠났다.

21세기고시원은 고시원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서울시가 지정한 쪽방이다. 고시원이 들어선 건물은 1955년 등기가 접수된 낡은 건물이다. 건축물대장상으로는 2층짜리 건물인데, 고시원이 있는 곳은 3층이고 그 위로 4층도 있다. 이미 오래전 불법 증축됐을 가능성이 크다. 고시원 내부는 성인 두 사람이 서 있으면 지나가기 어려운 중앙 통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총 45개의 방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방별로 크기가 제각각인데 대개 1평(3.3㎡) 남짓이다. 화장실이 있는 방은 없고, 모든 입주민이 중앙 통로 끝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한다. 외부로 연결된 창문이 있는 방은 열두세 개 남짓. 그렇지만 월세는 거의 모든 방이 30만원대다. 건물주의 퇴거 통보가 있던 날, 고시원에는 약 30명의 주민이 살았는데 6월 24일 기준으로는 10여명의 주민만이 남았다.

“밖은 이 쪽방보다 못한 현실인데, 오갈 데 없으니 여기서 사는 거지.”(주민 B씨)

21세기고시원은 주거의 최후저지선이자, 주거복지의 최전방이다. 남은 주민들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이고, 일부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도 가지고 있다. 어렵사리 떠날 곳을 찾은 사람도 있지만, 누워서만 지내 떠날 곳을 알아볼 엄두를 못 내는 사람도 있다. 이미 한 번 이상 이런 일을 겪어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고, 더는 밀려날 수 없다고 결연하게 다짐하는 이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쪽방 주민에 대한 강제 퇴거가 21세기고시원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의 소리소문없는 퇴거는 가난한 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장 손쉬운 해법이지만, 공동체와 사회로서는 더없이 무능한 방식이다. 계속 반복되는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오답일 가능성도 크다.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기치를 걸고 가장 취약한 곳에서조차 머뭇거리는 복지행정을 들여다봤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

60대 남성 B씨는 지난 6월 24일 방에서 죽을 먹고 있었다. 신장 투석을 하러 서울 서대문역 인근에 있는 병원을 막 다녀온 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는데 지난해부터 양쪽 발바닥이 괴사하기 시작했다. 왼발은 엄지·검지·중지 발가락을 절단했다. 각종 합병증에 B씨는 거의 매일 병원에 가야 하지만, 발의 괴사가 시작된 후 혼자 움직일 수가 없다. 올해부터 하루 6시간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다닌다.

지난 6월 24일 늦은 점심시간, 병원에서 투석을 받고 온 21세기고시원 주민 B씨가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보고 있다.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던 그는 지난해부터 양 발바닥이 괴사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혼자 거동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건물주의 퇴거 통보에도 이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효상 기자

지난 6월 24일 늦은 점심시간, 병원에서 투석을 받고 온 21세기고시원 주민 B씨가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보고 있다.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던 그는 지난해부터 양 발바닥이 괴사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혼자 거동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건물주의 퇴거 통보에도 이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효상 기자

그는 21세기고시원에서 약 10년을 지냈다. 좋아서 산 세월이 아니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그는 “아무리 더워도 오후 2시 전에는 에어컨을 안 틀어 주니, 선풍기 한 대로 땀 뻘뻘 흘리면서 버텼다”고 했다. 21세기고시원에 에어컨은 복도에 걸린 벽걸이 2대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그는 꾸준히 공공임대주택을 신청했다. 그러나 번번이 미끄러졌다. 그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매년 신청했다. 임대주택을 새로 지어서 신청을 받는 게 아니라 지어놓은 데서 원래 살던 사람이 나가야 신청을 받는다. 그러니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했다. 낙첨 이유에 대한 그의 어림짐작은 그리 틀리지 않는다. 영구임대주택은 1993년을 끝으로 사실상 공급이 끊긴 상태다. 주택관리공단이 관리하는 영구임대주택은 지난해 기준 14만1900여 세대로 2009년보다 1800여 세대 늘어나는 데 그쳤다.

퇴거를 통보받은 지금, B씨는 이사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처지”다. 활동지원사에게 부탁해 이사할 집을 알아보고 있다. B씨는 “인근에는 대부분 월세가 40만~45만원이고, 그나마 (중구) 신당동이 38만~40만원이더라. 그런데 이사할 돈도 없고, 힘이 없어 혼자 쇼핑백도 못 드는데 이 짐을 어떻게 들고 가나”라고 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월세방에 사는 그는 한 달에 34만1000원까지 주거급여를 지원받을 수 있다. 월세 30만원인 21세기고시원에 살 때는 30만원이 지원돼 주거비 내에서 월세를 낼 수 있었다. 신당동의 가장 저렴한 방으로 가도 주거급여에 4만원가량을 더 보태야 한다. 고정적인 병원비, 병원까지 가는 택시비에 때때로 입원비도 부담해야 하는 사정과 치솟은 물가를 고려하면 B씨에게 4만원은 적지 않은 부담일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21세기고시원은 팍팍한 가계부 사정에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도 했다. 쪽방으로 지정돼 있어 주민들은 하루 한 끼를 지원하는 동행식당, 한 달 2회 이용권이 제공되는 동행목욕탕 등을 이용할 수 있었고 각종 기부 물품도 받을 수 있었다. 주민들이 사정이 비슷한 고시원으로 이사를 하더라도 쪽방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일 가능성이 크다. 서울시가 쪽방 양산의 부작용을 막겠다며 지난 10년간 신규로 쪽방을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씨가 이사 갈 고시원이 그런 경우다. 새로 얻은 방은 공용화장실과 공용주방을 쓴다는 점에서 21세기고시원과 사정이 다르지 않지만, 제일 작은 방도 월세 35만원을 받는다. A씨는 5곳 정도 이사할 곳을 알아봤다.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쪽방도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신규 쪽방 지정이 이뤄지지 않는 사이 일부는 문을 닫으면서 쪽방의 수가 줄었다. 환경이 괜찮은 곳은 빈방이 없었고, 빈방이 있으면 환경이 지금보다 더 열악했다. 그는 “쪽방도 가봤는데 밥 먹을 데가 없고 험악해서 엄두가 안 났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결국 A씨는 주거의 질은 비슷하면서도 월세는 더 비싸고, 지원은 더 적은 곳으로 떠나게 됐다.

떠나지 않는 사람

지난 6월 24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동 21세기고시원 내부. 고시원은 성인 두 명이 서 있으면 사람이 지나가지 못할 너비의 중앙통로와 중앙통로에서 좌우로 잔가지처럼 뻗어 나온 8개의 작은 통로로 구성돼 있다. 작은 통로의 폭은 중앙통로의 절반 수준이다. 방은 8개의 작은 통로에 3~6개씩  연결돼 있고, 총 45개다.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한 70대 남성 주민 F씨가 통로 끝 방에서 TV를 보고 있다. 이효상 기자

지난 6월 24일 오후 서울 중구 회현동 21세기고시원 내부. 고시원은 성인 두 명이 서 있으면 사람이 지나가지 못할 너비의 중앙통로와 중앙통로에서 좌우로 잔가지처럼 뻗어 나온 8개의 작은 통로로 구성돼 있다. 작은 통로의 폭은 중앙통로의 절반 수준이다. 방은 8개의 작은 통로에 3~6개씩 연결돼 있고, 총 45개다.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한 70대 남성 주민 F씨가 통로 끝 방에서 TV를 보고 있다. 이효상 기자

60대 남성 주민 C씨는 지난 6월 24일 오후 답답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고시원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는 21세기고시원을 떠날 생각이 없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애초 이 고시원에 들어온 것도 또 다른 강제퇴거 때문이었다. 지난해 초 C씨는 21세기고시원의 바로 옆 고시원 허브레지던스에서 쫓겨났다. 사유는 리모델링이었는데 그 고시원은 심지어 퇴거까지 단 15일만 줬다. 그는 “그때는 나가라고 하면 나가는 게 맞는가 보다 하고 나왔다. 내일이면 문 잠근다고 해서 일단 짐 싸서 길바닥에 내려놨다. 울며불며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용달 불러 멀리 가는 사람도 있고 난리도 아니었다. (21세기고시원은) 분위기 안 좋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나도 급하니까 왔다. 급한 게 티 났는지 월세를 32만원으로 더 비싸게 부르더라”고 했다.

그의 퇴거 이후 허브레지던스는 어떻게 됐을까. 잠깐의 리모델링 후 프리미엄 여성 전용 고시원으로 탈바꿈했다. 30만원을 받던 월세는 45만~55만원 선까지 올랐다. 인근에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심 한복판이기에 상대적으로 비싼 월세에도 수요가 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크게 늘었고, C씨에게는 “꿈도 못 꾸는” 곳이 됐다. 허브레지던스가 입주해 있는 경동빌딩과 21세기고시원의 건물주는 같은 사람이다. 아버지로부터 21세기고시원 건물을 상속받은 1950년대생 두 형제가 인근에만 3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주민들을 내쫓는 21세기고시원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를 두고 이 동네에서는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일설에는 철거 후 7층짜리 건물이 올라간다는 얘기도 있다. 퇴거를 경험했던 주민들은 허브레지던스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한다. 확실한 것은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사업이 추진되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유탄을 맞는 건 21세기고시원 주민들이다.

21세기고시원만 문제가 아니다. 리모델링 등의 사업이 투자 방식 중 하나로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지 오래고, 갈수록 가속화하고 있다. 더 비싸거나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주거취약층의 주거 불안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고시원 업주들이 모인 인터넷카페에는 2022년 중순 ‘고시원 인수 후 리모델링할 때 기존 입실자 명도 제일 빠르게 하는 법’이라는 글이 공지사항으로 올라왔다. 이 글은 고시원이 고령의 주거취약계층이 사는 곳임을 전제하면서 월세를 40만원대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기존 입주자의 퇴거가 필수적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3가지 요령을 제시하는데, ①주민들에게 고시원 주인이 아니라 직원으로 소개하기 ②고시원 운영 종료 안내문을 붙이고 운영 종료일은 길어도 2주 이내로 고지하기 ③빨간색으로 철거라고 적는 등 분위기 조성하기 등이다. 최근엔 이런 방식의 사업이 너무 활발하게 이뤄져 고시원 리모델링 시장이 ‘레드오션’(경쟁이 치열한 시장)이 됐다는 얘기도 있다.

사업주는 물론이고 입주민조차 월 단위 단기계약을 맺는 고시원은 주택임대차보호법 상의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어 이런 일이 더 쉽게 벌어진다. 그러나 법원 판단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 2015년 서울 용산구 동자동 9-20 쪽방촌 건물주는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퇴거를 통보했다. 주민 일부가 강제철거는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위배된다며 법원에 공사중지가처분을 냈다. 법원은 쪽방 계약이 한 달짜리여도 법적으로는 임대차 기간이 2년으로 인정된다며 주민들의 가처분을 인용했다. 취약층의 주거권 보호를 위해 행정부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이미 마련된 셈이지만, 21세기고시원 사태에서도 서울시청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서울시청 관계자는 “(입주민들이) 주택임대차보호법상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를 직접 판단할 수 없어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에 자문을 의뢰했다”고 말했다. 쪽방촌·고시원의 주민들이 밀려나는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는데, 행정관청은 아직 판단 기준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시는 시장의 이런 흐름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있다. 21세기고시원 문제를 서울시청과 함께 대응 중인 시립 남대문쪽방상담소 측은 쪽방으로 지정된 서울역 인근 고시원에 공실이 있어 충분히 주민들 이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해당 고시원은 공용화장실이라도 남녀 화장실이 따로따로 있던 21세기고시원과 달리 남녀가 한 화장실을 써 주거환경이 낫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일대는 봉래 도시정비형재개발구역으로 묶여 있다. 주거용이 아닌 업무용 건물이 들어설 예정으로 지난 5월 말에는 바로 옆에 있는 고시원에서 주민들이 퇴거당했다. 언제 또 퇴거가 진행될지 모르는 곳을 대안으로 제시한 셈이다.

밀려나는 사람들은 어디로 어떻게 갈 수 있을까. C씨는 이미 21세기고시원에서 방을 뺀 73세 여성 주민 D씨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퇴거 통보에 D씨는 이사할 집을 알아보러 신당동 고시원을 찾았다. 고시원 총무는 D씨의 나이를 묻더니 “안 받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얼마 전에 70대 한 분이 연고지도 없이 여기서 돌아가셔서 참 힘들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C씨는 “D씨가 이틀 동안 끙끙 앓다가 다니던 교회 가서 얘기를 했나 보더라. 교인 한 분이 그 고시원을 같이 가서 ‘D씨 신변에 이상 생기면 내가 하겠다’ 보증서를 써주셨다더라. ‘그렇게 방 얻었다. 나는 그러면 어디로 가라는 거냐’고 울면서 얘기하는데 나도 눈물이 나는 거야”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역시 허브레지던스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는 50대 남성 주민 E씨도 이런 일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고시원 방 구하러 가면 회사 들어가려고 면접 보는 것 같아. 아래위로 훑고, 술 먹는지 물어보고, 다리 불편한지 물어보고. 여기 남은 분들은 실질적으로 방 얻기가 쉽지 않아”라고 했다.

C씨는 “들짐승·산짐승도 해 떨어지고 바람 불면 자기 집 찾아간다. 우리는 근데 어딜 다시 가도 ‘방 빼세요’ 하면 또 나가야 한다. 어떻게 그걸 또 하냐고. 다른 사람 다 나간다고 해도 나는 송장 치운다 생각하고 있을 판이다”라고 했다.

“마찰 없이 평온 무사한 퇴거”

“솔직히 (주민들이) 돈 조금이라도 더 받고 나가고 싶은 거겠죠.”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는 당사자 중 한 명은 이같이 말했다. 공공임대주택의 공급 부족, 쪽방의 수를 제한하고 적극 지원하지 않는 정책 방향, 도심 고시원 재개발·리모델링에 열을 올리는 시장의 흐름, 개인의 재산권 행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때 개입을 주저하는 행정 철학. 난마처럼 얽힌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단이 없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해법은 돈 몇 푼을 더 주고 주민들을 이사시키는 것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은 주민들의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비슷한 일들에 선례로 삼을 사회적 해법도 될 수 없다.

결국 서울시는 대책 방향을 주민들의 잡음 없는 퇴거로 잡은 듯 보인다. 인근 쪽방 현황을 파악해 입주를 알선하고 거동이 불편한 주민의 이삿짐 수송을 지원하기로 했다. 건물주의 문제 해결을 정책수단을 동원해 돕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울시의 대응은 “약자와의 동행을 최우선 가치로 두겠다”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취임사와는 동떨어져 있다. 서울시가 이 사건을 최초로 알게 된 시점도 지난 6월 17일이었다. 서울시는 미흡한 대응을 질타하는 언론 보도가 계속되자 지난 6월 25일 해명자료를 냈는데, “대부분의 입주자는 마찰 없이 평온 무사하게” 이주했다거나 “(건물주가) 특히 마지막 한 달은 고시원비를 면제해 주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약자 보호는커녕 건물주와 주민 사이에서 중립도 지키지 못한 셈이다. 현재 남아 있는 주민 수를 축소하고, 건물주의 주장을 근거로 퇴거 통보가 올해 2월에 이뤄졌다고 하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도 담겼다.

이동현 활동가는 “지정된 쪽방들도 정비사업으로 없어지고 있어서 방을 빼는 주민들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다. 보증금 없이 30만원대로 방을 찾을 텐데 주거의 질은 좋아질 리 없다. 주거의 질과 상황이 안 바뀌었으면 신규 쪽방으로 지정해서 사각지대에 있는 주민들을 보호하는 게 약자 동행 정신에 더 맞지 않겠나. 쪽방 주민의 복지 및 생활안정지원에 관한 조례를 보면 쪽방 주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할 주체가 서울시장이라고 규정돼 있다. 주거지 박탈은 생활안정을 불가역적으로 해치는 조치인데 손 놓고 있는 것이 맞는지 묻고 싶다. 이 일을 사인 간의 문제로 치부한다면 국가는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민 E씨도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대책이 있느냐’는 말에 그는 “그런 거 생각 안 해. 인생은 파도야. 우리 같은 사람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사람이 뭘 바라면 안 돼. 고통이 생기니까”라고 했다. 이어 “그래도 나는 젊으니 상관없는데 여기 형님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정치는 따뜻하고 돌볼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같아. 어른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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