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재미있는 일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다. 내가 당사자면 세상을 끝장낼 것처럼 피가 터지게 싸우지만, 남의 싸움은 관람자 관점에서 평가하면서 볼 수 있다.
미미한 교통 접촉사고가 나면 당사자들은 블랙박스를 보기 전에 일단 목소리부터 크게 내고 본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구경꾼으로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기에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응원하면서 본다.
경찰이 와서 블랙박스라는 증거를 제시하면 잘못한 사람이 꼬리를 내리게 마련이지만 관람자는 경찰의 처리까지는 관심이 없다. 그저 눈앞에 상황만 보고 지나갈 뿐이다.
물론 싸움은 단순히 목소리가 크다고, 구경꾼이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면 악기마다 저 잘났다고 연주하면 듣는 관객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 공해에 시달린다. 악기마다 특색을 죽이고 서로 조금씩 음을 맞춰가면서 연주해야만 좋은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조화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 프란체스코 브루네리(Francesco Brunery·1849~1926)의 ‘불협화음 이중주’이다.
악보대 앞에서 추기경이 눈을 찡그리면서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 서 있다.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는 다른 추기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자에 앉아 있다. 추기경들 뒤에 있는 탁자에는 간식 접시와 커피잔이 놓여 있는데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는 주교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고 있다.
추기경들은 휴식시간을 이용해 곡을 연주하고 있다. 탁자 위에 있는 간식 접시가 휴식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추기경들 사이에 있는 양방향 악보대는 이들이 각각의 악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서 있는 추기경은 귀를 막으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다른 추기경의 클라리넷 연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인가 보다. 클라리넷을 불고 있는 추기경의 표정도 주목할 만하다. 동그랗게 뜬 눈은 추기경의 행동에 놀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연주에 놀라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기도 하다. 단지 입으로 악기를 불고 있어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다.
뒤에 앉아 있는 커피를 마시는 주교는 음악 때문에 싸우는 추기경들을 구경하며 활짝 웃고 있다. 방안의 그림과 조각상 그리고 고급스러운 가구는 고귀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보여준다.
브루네리는 이 작품을 통해 성직자들을 희화화했다. 배려와 타협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만 내는 성직자들의 아집을 음악이라는 주제로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다. 결국 사람들은 목소리 큰 사람도 아니고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음악처럼 조화롭게 서로서로 배려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
<박희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