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독립운동사적지 기록하는 김동우 사진작가
개인의 기억은 ‘기록’을 통해 집단의 역사가 된다. 휘발성 강한 기억을 누구나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게 붙잡아 두는 것이 기록의 역할이다. 기록이 없다면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 설사 불행한 기억이라도 이에 관한 기록을 찾고 정리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역사로 남겨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국권이 강탈당한 불행한 역사 속에서도 한국인은 그 시대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불법적’ 식민지배에 맞선 ‘3·1운동’이 있었고, 목숨을 바쳐 일제에 항거한 셀 수 없이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일제에 35년간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족적 정체성, 글, 문화 등 무엇하나 잃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캘리포니아 작은 시골에 최초의 한인 비행사 양성소로 쓰인 건물이 남아 있어요. 지난해 1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꼭 이곳을 보존해 달라 부탁드렸죠. ‘너무 비싸면 못 사고.’ 대통령의 무심한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 한동안 술만 마셨어요.”
문제는 이러한 기록은 스스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찾고,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이 맡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이 때문에 잃어버린 기록을 찾고, 관리하고 주기적으로 갱신하는 역할은 주로 국가가 맡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굉장히 독특한 곳이다. 국가가 사실상 중단해 버린 일을 개인이 사명감으로 이어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김동우 작가는 7년째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닌다. 지금까지 방문한 나라만 10여 곳에 이른다. 비용은 모두 사비로 감당한다. 그의 기록 방식은 주로 사진이다. 독립운동사적지라는 국가 기록을 보고 찾아갔지만 풀만 무성하게 자란 빈터 일 때도 있고, 생뚱맞은 건물이 들어섰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이곳의 변천사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그런 곳이 있더라’는 기억을 역사로 변모시키는 일을 실제로 하는 셈이다.
지난 2월 27일 김 작가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숱한 역사적 현장을 찾아다닌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갖은 고생 끝에 독립운동 현장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이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난 후 남은 것은 김 작가가 느낀 슬픔이었다. 김 작가는 사적지를 찾고 기록을 한다. 이에 대한 보존과 활용은 그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에 김 작가는 지난해 1월, 윤석열 대통령을 직접 만나 반드시 연구 및 보존이 필요한 사적에 대한 보호를 부탁했다. “너무 비싸면 못 사고.” 무심하게 돌아온 한마디였다. 대통령에게 요청한 것은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살까, 말까 고민하는 명품 가방 같은 것이 아닌 우리 역사에 대한 보존이었다. 지난해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사용한 돈은 알려진 것만 651억원이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닌다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인도 델리에 갔을 때 ‘레드포트(Red Fort)’라는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붉은 사암으로 만든 건물이었는데 인도 무굴제국의 마지막 궁성이라는 정도만 알고 갔다. 그런데 방문 전에 우연히 자료를 하나 보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충칭에 있었던 광복군 9명이 이곳 레드포트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을 ‘인면전구공작대’라고 불렀고, 한지성이라는 인물이 대장이라는 구체적 정보도 함께였다. 이들이 인도로 파견된 것은 영국군 요청에 따라서였다. 일본인과 겉모습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영어, 일어를 모두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이들은 레드포트에서 공작대 활동에 필요한 포로 심문, 암호해독, 심리전 훈련 등을 받았다. 그리고 1944년 버마(미얀마) 탈환전에 참전했다. 심지어 이들은 광복 후 전원 충칭으로 무사 귀환한다. 이 자료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레드포트에서의 경험 이후 독립기념관이 공개하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분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중국 상해, 만주, 연해주 등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심지어 쿠바까지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를 기록한 자료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수십 년은 된 듯한 옛날 사진들만 남아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마침 사진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여서 나라도 제대로 기록해보자는 생각에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사진기가 독특하다.
“흔히 사용하는 일제 사진기가 아니다. 대표적인 일제 사진기 관련 회사가 전범 기업이다. 그들이 만든 사진기를 갖고 독립운동가들의 묘소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독일제를 쓰다가 최근에 스웨덴제로 바꿨다. 훨씬 더 비싸긴 해도 내가 하는 작업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진기를 구매하기 위해 갖고 있던 자산도 일부 팔았다.”
-몇 개국을 간 것인가. 또 그곳에서 방문할 사적지는 어떻게 찾나.
“작업을 위해 간 곳은 10개국이다. 인도, 중국, 일본, 미국, 멕시코, 쿠바,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다. 1차로 독립기념관의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자료를 참고해 방문할 나라를 정한다. 2차로 해당 지역에 관한 논문, 기사 등을 활용해 방문해야 할 지역을 확정한다. 마지막 3차로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어서 독립운동 관련 장소를 특정한다. 출발 전에는 논문부터 블로그까지 각종 참고자료를 전부 읽어본다.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방문지 리스트를 만드는 등 사전 자료 조사를 최대한 한다. 현지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야 할 때는 주로 한인회나 선교사님들의 도움을 받는다. 대사관도 있지만 내가 특별한 명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협조 요청도 어렵고, 된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독립운동가 후손분들은 어떤가. 찾아가면 귀찮아 하시지는 않나.
“대부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환영해주신다. 후손분들을 만나면 대부분 그 분들의 집으로 가서 촬영을 하는데 집에 꼭 우리 민족과 관련된 소품들을 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분들을 촬영을 할 때는 꼭 반투명하게 찍는다. 사라져버린, 흐릿한 우리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특히 쿠바에서 만난 이윤상 지사의 딸 레오노르 이 박님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한복을 입고 찍으면 안되겠냐’고 물으시더라. 이내 한복을 입고 나오셨는데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은데. 어떻게 감당하나.
“숙박과 이동에 필요한 차를 빌리는 데 돈을 가장 많이 쓴다. 그렇다고 호텔에 묵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게스트하우스 같은데 묵는데 아무래도 카메라 장비를 들고 다니다 보니 분실 우려 때문에 화장실을 공유하는 작은 방을 최우선 순위로 찾는다. 식사는 대충 값싸게 해결한다. 각국 물가 사정에 따라 두세 달 머물 때도 있고, 한 달이 최대인 경우도 있다. 비용 문제 때문에 1년에 한 곳 정도 방문하는 게 최선이다. 이를 위해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니며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독립운동사적지가 딱 한 군데인 나라도 있지 않나.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나.
“몽골이 그렇다. 의열단 소속 이태준 지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사는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실제 의사였다. 몽골 마지막 왕의 병을 고치며 주치의가 됐고, 몽골에서 추앙받는 사람이 됐다. 울란바토르에는 이태준 추모비가 남아 있다. 현재까지 몽골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는 딱 한 곳이지만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육체적인 힘듦은 견딜 수 있다. 그보다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 독립운동사적지를 방문해 가장 마음이 안 좋을 때가 아무것도 없는 ‘빈터’이거나 다른 건물이 서 있을 때다.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기록해두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심적으로 힘이 든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나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이걸 누가 기록하겠나. 이 흔적을 외롭게 두지 말자는 생각으로 버틴다. 대신 비어 버린 공간을 어떻게 100년 전 독립운동의 현장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빛이나 날씨로 표현해보는 식이다.”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나.
“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빨리 해결됐으면 하는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윌로우스’라는 곳이 있다. 작은 시골인데 이곳에 최초의 한인 비행사 양성소가 있었다. 한인 백만장자라고 불린 김종림과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국방부 장관) 노백린 장군이 의기투합해 세웠다. 특히 이곳은 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 아니다. 한인 비행사 양성소 교육장 건물이 남아 있다. 현재는 그 옆에 집을 짓고 사는 미국인 소유다. 독립운동 흔적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한국 공군의 시작점이기도 한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래서 지난해 1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보훈부 업무보고 때 정책자문위원 자격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이 건물에 관해 설명했다. 꼭 땅과 건물을 매입해서 후손들이 기릴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드렸다. 행사가 끝나고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할 때 재차 ‘꼭 좀 부탁드린다’라고 말씀드렸다. 윤 대통령이 한마디 하더라. ‘너무 비싸면 못 사고.’ 그날 행사가 영빈관에서 열렸는데 5시간 정도 기다려 대통령을 만났다. 그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옆에 서 있던 보훈부 장관에게 검토해보라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기뻤을 것이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한인 비행사 양성소가 남의 나라 사적지인가. 윤 대통령과 한국 보수는 국방을 강조하지 않나. 그렇다면 더더욱 중요한 곳 아닌가. 무표정하게 ‘너무 비싸면 못 사고’ 하던 대통령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서 한동안 술만 마셨다. 지난해 10월에는 국가보훈부 정책자문위원에서도 사퇴했다. 지금도 미국에선 연락이 온다. 건물 주인이 한국인들은 연구한답시고 귀찮게만 하고, 팔려고 해도 정작 매입은 하지 않는다고 화가 났다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2022년 무렵 이 건물에 페인트칠을 해버렸더라.”
-독립운동사적지를 방문하면 어떤 느낌인가.
“뭉클한 마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만주 길림성 나자구라는 곳에 가면 ‘태극기 동굴’이 있다. 덩그러니 있는 동굴 벽면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이준, 양(량)희, 지승호, 장태호라는 이름과 대한독립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연구에 따르면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라는 독립군 사관학교가 있었는데 그곳 학생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이들 4명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원래 북한 학자들이 1950년대에 먼저 발견했는데 벽면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으니 제대로 기록도 않고 묻혀 버렸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곳은 일반 차량으로는 접근이 안 된다. 트랙터를 빌려 타고 겨우겨우 갔다. 가서 보면,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뭉클하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아무런 보존 장치 없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훼손되면 어떡하나, 기록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얼른 사진부터 찍었다.”
-현장을 보다 보면, 화가 났던 경험도 있나.
“일본 후쿠오카현에 가면 소에다 마치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거기에 가면, 휴가 공동묘지라는 곳이 있는데 근처 탄광에서 일하다 죽은 조선인들을 몰래 화장해서 묻은 무덤들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바닥에 돌아다니는 못생기고 쓸모없는 돌멩이를 하나 갖다 놨다. 일종의 묘비인 셈이다. 이곳에 묻힌 조선인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런 무덤 옆에는 반려동물 무덤도 함께 있다. 동글동글하고 잘생긴 돌로 이곳이 반려동물 무덤이라고 표시를 해뒀다. 반려동물보다 못한 것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곳도 있었나.
“미국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가면 알라에 공동묘지란 곳이 있다. 한인 150명 정도의 무덤이 이곳에 있는데 대부분 연고 없이 버려진 무덤이다. 그런데 최근 이 알라에 공동묘지에 적힌 이름과 안중근 의사에게 의연금을 보낸 명단을 대조한 연구가 있었다. 50명의 이름이 일치했다. 각자 1달러 75센트 정도를 냈는데 당시 한 달 일하면 받는 임금이 18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미주로 이주해 갖은 고생을 하며 번 돈을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낸 것이다. 특히 빅아일랜드 캡틴쿡 공동묘지에 묻힌 이주대 선생님은 안 의사 의연금으로 자신 월급의 3분의 2를 내셨다.”
-하와이 한인들 무덤 중 버려진 것들이 많나.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들이 많다. 빅아일랜드 코나 지역에 한인 무덤이 방치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었다. 정말 한 커피 농장 한쪽에 13기 정도의 한인 무덤이 방치돼 있었다. 그 중에 유독 썩은 꽃잎으로 덮여서 잘 보이지도 않는 넓찍한 콘크리트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손으로 한 번 쓸어봤더니 콘크리트 위에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이름이 나왔다. 경성 애오개 박기옥 선생님의 무덤이었다. 비석 쓸 돈이 없어 콘크리트를 부어 마감할 수밖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분들이 독립자금을 냈다.”
-촬영할 때 원칙 같은 것이 있나.
“역사적 순간을 최대한 되살려 보려고 한다. 강연하러 가면 종종 1932년 4월 29일 중국 훙커우 공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석자들에게 물어본다. 대부분 윤봉길 의사 의거라고 잘 대답한다. 그러면 윤 의사가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 재차 물어본다. 대부분 모른다. 윤 의사는 일본 가나자와에서 사형됐다. 당시 가나자와에는 일본군 9사단 본부가 있었는데 훙커우 의거 때 9사단 장교가 많이 죽었다. 그러자 일본은 윤 의사를 가나자와로 끌고 가 12월 19일 7시 반쯤에 사형했다. 윤 의사가 사형된 곳은 현재도 자위대 부대 안이다. 이곳을 12월 19일 7시 반에 방문해 촬영했다. 윤 의사가 마지막으로 본 빛, 하늘을 조금이라도 담아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계속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독립기념관이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소개하는 자료는 연구자들이 이른바 똑딱이 사진기로 오래전에 촬영한 사진이 대부분이다. 과거 사진을 보면 참 안타까운 수준의 사진이 많다. 요즘은 조금씩 최신 이미지로 바뀌고 있기는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운동 흔적이 남은 현장을 더욱더 생생하고, 성의 있게 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기록자로서 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기사 속 사진은 모두 김동우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작품들이다. 사진 설명 역시 김 작가가 직접 썼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