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석 시인 다섯 번째 시집 <차마고도 외전(外傳)>
지난 주말, 산사에서 시 토크를 했습니다. 독경과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법당에서 시를 읽고, 그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험은 생소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함께한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지요. 친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첫 만남이었습니다. 전생과 현생의 인연이 만들어낸 만남이었겠지요. 소극적 인연에 그친다면 관계는 시 한 편 읽고 끝날 것입니다. 그래도 함께 찍은 사진은 남을 것이고, 훗날 그 사진을 보며 기억을 되새기겠지요.
가족의 애환이 서린 왕십리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가 당선돼 문단에 나온 조현석 시인이 등단 35년을 맞아 다섯 번째 시집 <차마고도 외전(外傳)>을 냈습니다. 시집은 회갑(回甲) 당일에 세상에 나와 의미를 더했습니다. 1987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 기획과 편집 일을 한 시인은 ‘문예중앙’과 ‘월간중앙’에 이어 경향신문 편집국으로 이직한 뒤 섹션 ‘매거진X’ 취재기자로 일해 경향신문과의 인연이 깊습니다.
시인의 고향은 서울 중구 산림동, 옛 국도극장 맞은편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한 왕십리는 애환이 서린 곳이지요. 사업 부도 후 빚을 갚기 위해 수년간 “중동에서 오일달러 벌던 아버지”(이하 ‘왕십리’)가 다친 후 가세가 더 기울었다고 합니다. 다친 아버지는 구급차에 실려 김포공항 입국장을 통과했고요. 초등학교 졸업 때부터 시인은 신당동, 도선동, 마장동, 사근동 등 좁은 골목을 돌며 신문을 배달했습니다. 기계공고에 진학해 “기름 범벅 공고생이 밤새워 시”를 썼고, 배곯는다며 염려하던 어머니는 아들이 시인이 되자 동네방네 자랑합니다. 시인에게 왕십리는 “결혼해 첫 손자 보여준 곳”이면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백 일 만”에 여의고, “까닭 모를 불이 나서 살림살이 홀랑 타버린” 안타까운 곳입니다. 어머니를 보내고 아버지는 왕십리에서 20년 넘게 홀로 사셨습니다.
어버이날 “칠순이 코앞인 반백의 아버지”(‘설렁탕 한 그릇’)를 찾아뵌 시인은 40년 전통의 설렁탕집에 가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뚝배기에서 고기 몇 점을 아들의 뚝배기에 넣어줍니다. 당연히 눈시울이 붉어졌겠지요. 시인은 오래 만성중이염을 앓은 아버지를 “감악산 아래 노인요양병원”(‘백발 민들레’)에 모십니다. 한순간에 백발이 돼버린 비쩍 마른 아버지를 대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평생 노동으로 굵었던 팔다리 근육이 가늘어지고”(‘센베 과자’) 피부에는 검버섯과 주삿바늘 자국이 점점이 박혀 말라갑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아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초점을 잃은 시선은 늘 먼 곳을 향해”(이하 ‘곁’) 있고, 아들은 “피멍이 들 때까지” 가슴을 치다가 돌아옵니다. 결국 어느 이른 새벽 “아버지의 부음(訃音) 받고”(‘손가락 끝’) 불효에 슬피 웁니다. 화장(火葬)에 걸리는 시간은 59분 59초, “업보와 죄악이 꿈틀”(‘59분 59초’)대지요.
도시의 차마고도를 걷는 시인
이번 시집에는 차마고도(茶馬古道) 관련 시가 2편 실려 있습니다. 시 ‘차마고도’는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보고 쓴 것이고, 표제시 ‘차마고도 외전(外傳)’은 도시의 삶을 빗대었습니다. 차마고도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생긴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주요 교역로를 말합니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눈 덮인 5000m 이상의 설산과 아찔한 협곡을 잇는 이 길을 통해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뤄졌지요. 바라만 봐도 숨 가쁜 차마고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 사이”(이하 ‘차마고도’)에서 “비어져 솟은 돌멩이들 딛고 뛰어다니”는 산양 한 마리입니다. 또 그 험난한 길 따라 순례자가 “두고 온 지상의 미련”을 지우려 삼보일배를 합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음이 기다리지만, 산양도 순례자도 평온해 보입니다. 시인은 “깎아지른 빌딩의 그림자 꼿꼿한 도시”(이하 ‘차마고도 외전(外傳)’)에서 “천 길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길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무작정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하는, “삼보일배 고행을 강요”하는 사회를 목도합니다. 백척간두에 선 아찔한 삶이지요. 차마고도는 바로 여기이고, 산양과 순례자는 바로 자신인 셈입니다. “한평생 되새김질해야 할 외로움”으로 벼랑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차마고도를 지나듯 힘들게 살았지만”(‘시인의 말’) 그 어떤 것도 원망하거나 갈망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외롭고 “우울했던 적”(‘상현(上弦)’)이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시집 맨 앞에 놓인 시 ‘내가 봤다’에서 “펑펑 울었다”고 고백합니다. “요와 베개 사이 빈 공간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답니다. 한번 잠들면 알람이 울려야 깼는데, 자다가 울면서 깬 첫 경험이랍니다. 시인은 “이유 없이 덮쳐오는 불안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서쪽으로 계속 걸어 몸을 줄이면/ 고통 없이 잠들 나라에 닿을 수 있을까”(‘휴일의 구름’) 자문합니다. 저녁 호숫가를 산책하던 시인은 “노랗거나 붉거나 한 노을 끝 지나”(‘치명(致命)’) 잠깐 사이에 치명의 보랏빛 하늘을 봅니다. 목숨이 끊어질 지경임을 시를 통해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봄을 노래합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불안이나 고통 다음에 행복이나 기쁨이 찾아올 걸 알기 때문입니다. 얼었던 땅에 봄볕이 들썩이면 “바깥세상 보려고 하나둘 실눈”(‘우수(雨水)’)을 뜨는 까만 씨앗을 관찰하고, 회색 담벼락 담쟁이덩굴에서 봄의 옆얼굴을 감상하고, 하염없이 부드러운 햇살과 돌멩이에서 돋아나는 이끼, “흩날리며 빛나는 아지랑이”(‘춘경(春經)’)에 눈길을 주기도 합니다. ‘파르르 연두’에서는 “실바람이 타는 천 갈래 구름의 현악(絃樂)”을 듣고, “봄볕 좋은 물가에 앉아 귀에 고이는 소리”를 담습니다. 봄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시인은 다시 첫 자리에 섰습니다. 인생의 봄이지요. “연두의 여운, 결코 멈추지 않”듯, 시인은 초심으로 돌아가 계속 시를 쓸 것입니다.
◆시인의 말
▲자전거 바퀴
양수덕 지음·상상인·1만원
벗은 영혼에 옷을 입혀주려니 시가 부스럭거렸다. 덩달아 지난날의 덜 떨어진 한 사람 숨을 곳이 없다.
▲2월의 눈은 따뜻하다
이운진 지음·소월책방·1만원
10년을 세워도 허공 속이다. 제겨디딜 한 뼘 바닥도 없는 곳! 하지만 이 위태로움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강물이 물때를 벗는 이유
서봉교 지음·달아실·1만원
시 쓰는 것은 영적(靈的)인 작업이니, 시 한 편이 환영처럼 머리 뒤에 떠오르면 그때 한 편 쓰고, 아니면 놓고 하는 일을 수십 년 했다.
▲측광
채길우 지음·창비·1만원
타인들을, 심지어 자신조차 완벽히 속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만 진실을 실토하는 것이다.
▲가끔 실패하는 미래
전명옥·한국문연·1만2000원
작약꽃이 나를 흔들었지만 꽃이 왔던 시간을 찾으려고 문을 열었다. 뭇 생명들의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시라면 오독도 때론 위대하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