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큰 변화는 마스크 의무화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서, 지자체 등 기관 출입이 눈에 띄게 어려워졌다. 출입하려면 일일이 사전에 연락하고 방명록을 작성해야 했다. 입구에 출입증 바코드 스캔 기기를 도입한 지자체도 있었다. ‘외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내부 직원들도 재택근무를 하는 마당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가 “코로나19 때문에 만나기 어렵다”면서 사실상 취재를 거부하고 피할 때면 코로나19가 방패막이가 됐다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최근 연달아 발생한 흉기난동 사건을 보면서 ‘외부인 차단’ 이유가 한층 넓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감염 방지’에서 ‘치안 강화’가 더해졌다. 코로나19 유행 시기 외부인 출입이 불가피하게 막혔다면, 지금은 개인의 안전을 위해 필연적인 조치로 보인다.
유독 시선이 머문 사건은 대전의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흉기난동이다. 학교 안에서 벌어진 만큼 “어째서 ‘외부인’을 거르지 못했느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아무 제재를 하지 않았다”고 할 때 그 ‘제재’는 출입 거부일까, 소지품 검사일까. 신분증 확인으로 걸러낼 수 있었던 지점은 뭐였을까. 이런 사건 이후 얻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교훈은 외부인 출입 금지 매뉴얼을 더 촘촘하게 재정비하는 일일 테다. 출입을 금지할 수 없는 길거리엔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경찰들을 배치했다.
무고하게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 사건 목격자들로선 차단과 검열의 문턱을 아무리 높인다고 해도 위로가 안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함께해요”, “누구나 입장 가능합니다”와 같은 말은 불행히도 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영화 <내 이름은 칸>은 9·11 테러 이후 무슬림을 향한 시선이 차별과 혐오로 변한 미국사회의 ‘민낯’을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칸은 9·11 테러를 기점으로 ‘외부인’으로서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아빠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던 칸의 아들이 살해되고 아내까지 떠난다. 무슬림을 향한 적대감은 지금 우리 사회에 깔린 ‘외부인’을 향한 시선과 얼마나 다를까. 외부인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데서 오는 공포는 더 크다.
외부인 출입 금지와 검열 강화는 단기적으로 불안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장기적으로는 불신과 혐오의 사회, 배척이 당연시되는 사회로 갈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외부인’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종교, 인종, 성별 등 이유는 많다.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외부인 출입 금지”는 외부인에 대한 차별을 ‘어쩔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런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치안 강화 명분 아래 벌써 무고한 시민, 심지어 중학생이 범인으로 몰려 다쳤다. 불신과 차단으로 꽁꽁 무장한 사회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서로 코로나19 감염을 의심하던 시기를 거쳐 이젠 서로가 범죄자인지 경계한다. 그저 지금 처한 환경만 탓하기엔 위기상황에서 확인한 민낯이 너무 적나라하다.
<유선희 뉴콘텐츠팀 기자 y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