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웃는다. 정말 웃겨서 웃을 때도 있고, 사회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정형화된 모습으로 웃는 낯을 할 때도 있다. 상대방에게 나의 무해함을 전하려고 일부러 웃기도 한다. 웃음 포인트가 남다른 편이다. 남들은 안 웃긴다고 하는 상황에서 혼자 박장대소를 할 때도 많다. 난처한 상황이 되면, 어찌할 바를 몰라 또 그냥 웃는다.
웃는 낯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샀다. 수습기자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나 경찰서와 파출소를 돌고, 온종일 선배의 취재 지시를 따르다 자정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경향신문이 내가 입사한 해부터 수습기간 경찰서에서 숙식하던 이른바 ‘하리꼬미’(언론계 은어) 제도를 없앴으니까. 고작 서너 시간을 자더라도 내 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7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어떤 상황에서, 누가, 왜 그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한창 수습교육을 받던 차에 지적사항이 하나 떨어졌다. “편집국에서 너무 웃고 다니지 마라”였다. 아마 그런 의미였을 거다. ‘조직 최말단에 있는 수습이, 심지어 사건팀 교육 중에, 웃고 다닐 기운이 있다고?’ 억울했지만 한동안 회사에 들어갈 때면 일부러 ‘죽상’을 유지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A씨가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헬렐레하다”라는 묘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를 알고 있던 터라 매우 불쾌했다. 나중에 해명을 전해듣기론, 잘 웃고 다닌다는 좋은 의미로 쓴 말이라고 했다. 이후로 A씨를 마주할 땐 기를 쓰고 웃지 않았다. 재밌는 사실은 내가 더는 웃지 않자 “화가 난 것 같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요즘 말로 치면 ‘어쩔텔레비전’이 따로 없다.
케케묵은 이 기억을 소환한 건 최근 발생한 한 논란 때문이다. “(실업급여 신청 때) 남성분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오는데, 여자분들, 계약기간 만료, 젊은 청년들, 웃으면서 ‘이 기회에 쉬겠다’고 온다.” 여당이 개최한 ‘실업급여 제도 개선 공청회’에서 고용센터 실업급여 담당자가 했다는 발언이다. 실업급여를 ‘달콤한 시럽급여(syrup)’로 칭하는 얄팍한 논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성’, ‘청년’에 대한 편견을 앞세운 그 뻔한 전략에 실소가 나왔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5년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대는 실업급여 부정수급 비율이 전 연령대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높은 비율은 50대 남성(23.4%)이었다. 이런 사실은 그러나 중요하지 않았다. 젊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앞세운 순간, 논리적 비약은 보이지 않게 됐다. ‘샤넬 선글라스’가 포털뉴스를 장악했다.
이번 논란이 일깨운 사실은 하나다.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것. 웃는 여자에 대해서도, 웃지 않는 여자에 대해서도 어차피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세상이다. 웃어야만 힘이 나는 상황이라면, 마음껏 웃는 것도 방법이다. 실업급여로 선글라스를 사면 어떤가. 해외여행을 하면 또 어떤가. 그렇게 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유진 사회부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