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의회가 지난 12월 6일 624개 조항으로 구성된 형법 개정안(KUHP)을 통과시켰다. 인도네시아 입법자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던 오래된 형법을 대체했다며 자축했다.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근대화’를 이뤘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개인의 사적 영역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데다 법을 탈종교화하려는 세계적 추세와 역행한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시민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까지 나서 우려의 시선을 던진다. 이 개정안은 향후 인도네시아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내용을 들여다봤다.
혼외 성관계 금지법?
무엇보다 이번 개정안은 ‘혼외 성관계 금지법’으로 통칭되고 있다. 제411조에서 혼외 성관계를 1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전 형법은 ‘기혼자’의 혼외 성관계만을 고발 및 기소 대상으로 봤다. 새 법은 ‘기혼자’뿐만 아니라 ‘미혼자’의 혼외 성관계까지도 대상으로 한다. 자연히 결혼 전 성관계를 금지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인도네시아가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가 된다. 동성 간 성관계를 어떻게 볼지 법에 명시하진 않았지만, 법률혼 지위를 얻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동성 간 모든 성관계는 혼외 성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인권단체는 동성 관계를 범죄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우려한다. 더 나아가 제412조는 합법적으로 결혼하지 않고 ‘남편과 아내로’ 동거하는 부부 역시 징역 6개월을 받을 수 있다고 정했다. 이 역시 여러 이유로 법률혼을 할 수 없는 이들, 종교와 관습이 다른 소수 원주민, 성소수자를 더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법은 또한 응급상황 등을 제외하면 임신중절을 한 여성을 4년 이하 징역에, 임신중절을 돕는 이는 최대 5년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제463조·제464조). 피임과 임신중절에 대한 교육과 정보 제공도 금지한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이는 국제법에 따라 성교육을 받을 권리, 재생산권을 보호받을 권리를 후퇴시킨다”며 “의도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선택권 부족은 여아의 교육 중단과 조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형법이 관광객 등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고 알려지자 인도네시아 관광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겨우 회복에 나선 관광업계로선 악재가 추가된 셈이다. 한국인들도 휴양지와 신혼여행지로 흔히 방문하는 발리가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 관광산업위원회의 마울라나 유스란 부국장은 “이 법이 (관광 회복에) 완전히 역효과를 낳는다. 깊이 유감”이라고 가디언에 밝혔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커플이 면밀히 조사를 받을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고발이 들어오는 경우에만 조치를 취할 것이며 단속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성 김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는 “개인의 사적인 결정을 범죄화하는 것은 인도네시아에 투자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많은 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국인 투자, 관광 및 여행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문제 많은 법…“민주주의 후퇴”
이 법에는 또 민주주의와 언론·종교·표현의 자유를 위협할 여지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이데올로기 ‘판차실라’를 흔들려는 이는 최대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제190조). 대통령이나 부통령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징역 3년형에 해당한다(제218~220조). 폭동을 유발하는 가짜뉴스, 부정확하고 과장되거나 정확하지 않은 뉴스를 만드는 이들 역시 처벌 대상이다. 사전 허가 없이 벌이는 시위 역시 불법이다. 이전 형법에서 1개 조항을 통해 규정했던 신성모독죄는 이번 개정안에서 6개 조항으로 늘어났다. 인도네시아 정치분석가 아랴 페르난데스는 “명백한 민주주의와 자유의 후퇴”라고 파이낸셜타임스에 밝혔다.
당초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이 법안을 2019년에 통과시키려 했다. 당시 수십만명이 거리로 나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한 사망자도 발생하는 등 민심이 악화됐다. 그때 불거졌던 이 법안의 문제점 역시 오늘날의 시각과 대동소이하다. 이후 코로나19로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최근 드라이브가 걸려 어렵지 않게 의회 문턱을 넘었다. 법안 제정 과정이 불투명하고 사회적 공론화가 부족했다는 비판은 여전하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문제가 불거졌던 이 법안이 어떻게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일까. 대중을 통제할 더 강한 도구가 필요했던 인도네시아 정부, 판차실라를 수호해 이슬람 보수주의에 대항하기를 원한 민족주의 계열 정당, 혼외 성관계 금지와 같은 이슬람 가치를 반영하려는 이슬람 계열 정당 등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올해 안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 연임 중인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다음 대선에 출마할 수 없어 인도네시아의 정계 재편이 예고된 상황이다.
개정안은 초안 작업과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최대 3년 이후에야 시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혼란은 이미 시작됐다.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에선 이 법을 헌법재판소에 보내려는 움직임도 있다. 정치 전문가 제퍼슨 응은 “새 형법 조항이 명확하지 않아 이 법이 정확히 어떻게 시행될지 또는 어떤 행동이 용납되는지 모르는 기업과 개인들에게 불확실성을 야기한다”고 지적했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혼외 성관계 금지 조항에 대해서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관광객이 피해를 볼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싱가포르 유소프 이스학 연구소의 디시 시만드준탁 박사는 그러나 “뇌물을 노리고 특정 산업이나 호텔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적 집행이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노동자 디마스(25)는 “정부는 시민의 성생활보다 기후변화, 일자리, 임금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더 신경써야 한다. 경기침체와 취업난으로 삶이 어려워졌다. 정부가 이 새로운 법을 이용해 이러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