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치·문화예술 넘나드는 조광희 변호사
백색의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그는 작은 여성용 손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휴대전화 등 간단한 소지품을 넣고 다니기 편해 든다고 했다. 흔히 연상되는 중후한 중년의 남성 변호사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겉멋’보다 ‘실용’을 우선하는 이라고 생각했다. 조광희 변호사(56) 얘기다.
그는 칼럼니스트이자 소설가·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2018년 여러 매체에 써온 글을 엮은 산문집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과 추리소설 <리셋>을 잇따라 펴냈고, 지난해에는 SF소설 <인간의 법정>을 출간했다. 100년 후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생명과 소수자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치열한 법정공방을 통해 던지는 작품이다. 최근에는 그가 직접 각색한 뮤지컬 <인간의 법정>이 서울 대학로 무대(12월 4일까지 아트원씨어터)에 올랐다.
그의 이력은 꽤 다채롭다. 2000년대 중후반 ‘영화사 봄’ 대표로서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 등을 제작했다. 2006년 서울시장선거에서 강금실 후보를, 2013년 재보궐선거와 2012년·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아 정치 경험도 했다.
차가운 법과 뜨거운 정치 그리고 따뜻한 문화예술 사이를 보폭 넓게 오간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난 11월 1일 오후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의 법정>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요.
“2018년 첫 번째 소설 <리셋>을 출간하고 언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기자가 차기작을 물을 것이라는 지인의 사전 귀띔에 사실은 좀 급조했어요(웃음). 미래의 법정 드라마라면 유니크한 데다 내가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살해하고 재판을 받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막상 쓰려니 쉽지 않더라고요. 저는 작업할 때 전체 줄거리를 먼저 쓴 다음 그것을 각 챕터로 나눈 후 한 챕터씩 써내려가거든요. 그런데 전체 줄거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완성했나요.
“2년여쯤 묻어뒀어요. 그러다 재작년 가을 무렵 갑자기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전체 줄거리를 작성했어요. A4용지 20매 분량으로 완성해 지인들에게 보여줬더니, 반응이 좋더라고요. 힘을 얻어 쓰기 시작해 작년 4월 책을 출간한 거예요.”
소설은 2112년, 뮤지컬은 2084년의 미래사회가 배경이다. 인간의 DNA를 바탕으로 주인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를 사고파는 게 일반화된 시대다. 안드로이드에게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의식생성기를 장착하면 감각을 느끼고 생각도 할 수 있다. 작품은 의식생성기를 장착한 후 정체성 혼란을 겪는 안드로이드 ‘아오’가 의도치 않게 주인을 살해한 후의 법정 다툼이 주내용이다. 의식을 가진 로봇이 인간처럼 헌법이 명시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형사재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두고 ‘아오’를 대리하는 변호사 ‘윤표’와 경찰청 소속 변호사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다.
-이 작품을 접하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1년 영화 <A.I>를 떠올린 이도 있을 것 같아요. 필요에 따라 안드로이드를 만들고 이용하고 폐기하는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차별당하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인간의 법정> 집필에 참고한 작품이 있습니까.
첫 소설 <리셋> 인터뷰 때 급조했던
법정 선 안드로이드 얘기 <인간의 법정>
뮤지컬로 각색해 대학로에서 공연 중
“과거 <A.I>,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영화를 두루 봤지만, 특별히 참고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집필이 끝난 후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스토리가 뛰어난 게임, 드라마 등 관련 콘텐츠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차라리 안 찾아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먼저 봤다면 제 상상이 제약됐을 거예요.”
-인간의 노예와 다름없는 안드로이드들이 자유 의지를 갖게 되면서 도주한 동물들과 연대해 ‘포스트휴먼 해방전선’을 결성해 인간에게 대항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더군요.
“인간 내의 소수자들은 투쟁을 통해 보편적 권리를 취득해가는 과정에 있어요. 저는 그것이 거의 마무리되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간에 계급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의 발전 법칙에서 봤을 때 시혜를 통한 문제해결은 거의 없어요. 그러면 그런 존재들이 인간보다 우월한 어떤 능력을 바탕으로 해방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한 거예요.”
-동물권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채식주의자인가요.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서 제가 일관성이 없어요. 젊었을 때 채식을 시도해본 적은 있는데 철저히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지금은 조금 죄의식을 느끼면서 육식도 해요. 하지만 방향은 그리(채식)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대체육도 점점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뮤지컬 판권은 장소영 음악감독이 사서 직접 제작했는데, 영상화 판권도 이미 팔렸다고요.
“<버닝> 등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많이 제작한 나우필름과 <부산행>, <반도>를 제작한 레드피터가 영화와 드라마 판권을 공동구매했어요. 현재 각본 작업 중인 것으로 알아요. 소설은 베트남, 태국, 독일에 판권이 팔렸고요.”
그는 1966년생이다.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 인근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계를 위해 경북 영천에서 상경한 그의 부모는 빈손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철거민이 되어 신림동에 머물다가 이곳으로 떠밀려왔다. 무허가집 방 한 칸에서 다섯식구가 살았다. 아버지는 작은 세탁소를 운영했다. 그는 “연탄가스를 마신 나를 누군가 등에 업고 새벽길을 내달린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가족은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사했다. 당시만 해도 인근에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가 있던 가난한 동네였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열었다. 초등학생인 그에게는 외상 장부를 정리하고 곡물 가격을 적는 일을 시켰다. 체구가 유난히 작았지만 일손이 달리면 배달도 했다. 그는 새벽에 친구와 함께 빈 병을 주워 용돈을 벌기도 했다.
소수자들의 권리 위한 투쟁처럼
인간 아닌 존재의 해방운동 상상
영화와 드라마로도 판권 팔려
-초등학생 아들에게 외상 장부를 맡긴 것을 보면 꽤 똑똑했나 봅니다.
“조금은 명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호적상 만 4세, 실제 나이로는 만 5세 때 학교에 입학시켰어요. 호적 나이가 실제와 다른 이유는 1년 늦게 출생신고를 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가난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했어요. 그로 인한 한(恨) 때문인지 교육열이 대단하셨죠. 아들을 변두리 학교에 안 보내겠다며 위장전입까지 해서 서대문구 연세로에 있는 서울창서초등학교에 다니게 했어요. 상암동에 버스가 없어 혼자 북가좌동까지 30분간 걸어 나와 142번 버스를 탔어요. 등교시간만 1시간씩 걸렸죠. 중학교도 이대부속을 다녔고요.”
-어린이 혼자 그 먼 거리를 통학했다고요.
“형과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혼자서도 많이 다녔어요. 지금이라면 아동학대로 신고 들어갈 일이죠(웃음).”
-어려서부터 작문이나 문학에 재능이 있었습니까.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한 책값은 아끼지 않았어요. 당시엔 가정집을 상대로 책을 팔러 다니는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있었어요. 그들로부터 사들인 문학전집과 위인전이 집에 많았고,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영화도 많이 봤어요. 저희 쌀가게가 개봉 영화 포스터 붙이는 지정 장소였거든요. 그 대가로 영화초대권을 줬어요. 상암동에는 극장도 없어서 모래내 은좌극장까지 가서 봤어요. 그리고 문학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한 시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예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국어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 외우기를 독려하고 낭송하게 했어요. 시 장부도 작성하게 했고요. 강박적으로 열심히 했어요. 그러면서 언어의 뉘앙스와 리듬을 배운 것 같아요.”
-문학을 꿈꿨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문예반 활동도 안 했어요. 대학 때 습작을 한 적은 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중·고 시절 내내 모범생이었을 것 같아요.
“아유, 아닙니다. 고교는 경성고를 다녔는데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2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디스코텍, 술집을 돌아다녔어요.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면 제일 먼저 영화관에 달려갔고요. 술 먹고 사고친 친구가 조광희도 디스코텍 다닌다고 선생님께 일러바쳐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어요(웃음).”
인권변호사 목표로 법조인 되고
영진법 제정 참여로 영화계와 인연
영화사 대표 거쳐 관련 소송 단골
1984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뒤늦게 뛰어든 건축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집안 살림이 활짝 폈다. 그는 1990년 삼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입소를 연기하고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녔다. 진보적 법률학술단체인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활동을 하고 이적단체로 판결난 ‘노동자대학’에서 노동법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연수원 졸업 후 1994년 법무법인 ‘화우’의 전신으로 미국식 로펌 시스템을 도입한 ‘우방종합법무법인’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주로 대기업을 자문하는 업무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결국 1년 만에 퇴사하고 1995년 서초동에 개업했다. 이때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가입해 활동했다. 국가보안법, 집시법 등으로 재판받은 이들을 지원했다. 1997년 백승헌, 송두환, 차병직, 정연순 변호사 등과 법무법인 ‘한결’을 설립했다.
-변호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기는 전두환 집권기였어요. 정권에 맞선 민주화 시위가 빈번했죠. 하지만 2학년 때까지 저는 용기가 없어 심정적으로만 동조했어요. 그런 어느 날 사범대에 다니던 저와 같은 중학교 출신 선배 한 분이 갑자기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공부해서 사회에 기여하면 되지, 왜 저런 방식이어야 할까 이해가 안 됐어요.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 싶어서 사회과학서적을 보기 시작했어요. 석 달 만에 의식화가 되더라고요. 법률가가 돼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국가보안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구속되는 등 법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법을 전공하는 게 의미 없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사법시험을 안 보겠다고 선언했는데, 동의하지 않으셨어요. 저항의 표현으로 3학년 2학기 때 휴학했어요. 아르바이트와 독서, 시·소설 습작을 하며 1년을 보냈어요. 그러다 판·검사 말고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타협한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판·검사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당시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일부 판·검사들의 행태 때문이겠군요.
“당시 시국 사건에서 정치적 판단을 해 죄 없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일이 숱하게 있었으니까요.”
-문화예술 전문 변호사가 된 건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사법연수원 시절 몇몇 동기와 주동해 영화동아리를 결성했어요. 그러다 1996년 영화진흥법 제정 작업에 합류하면서 영화인들과 교류하게 됐죠. 1990년대는 사전검열이나 스크린쿼터 폐지 문제 등이 크게 불거졌을 때니까요. 1999년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가 해임된 감독을 법률대리해 제작사를 상대로 영화 제작 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승소했어요. 그러면서 영화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죠(웃음). 이후 많은 영화사가 제게 법률자문을 구했어요.”
그는 2001년 영화진흥법상 등급보류분류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또 <하얀방>, <범죄의 재구성> 등 상영중지 가처분 사건과 저작권 관련 소송을 도맡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계는 모든 계약서가 달랑 한장짜리에 불과했다. 그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쓰는 계약서들을 참고해 한국식 계약서 형식을 만들었다. 2003년 종류별 계약서 샘플을 담은 책 <영화인을 위한 법률 가이드>도 펴냈다. 당시 한국영화 크레딧에는 ‘법률자문 조광희’가 단골로 적혔다. 2004년 안식년을 맞아 1년간 뉴욕에서 체류하고 돌아온 그는 2006년 강금실 당시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같은해 6월에는 ‘영화사 봄’에 3년 계약으로 제작관리본부장으로 영입돼 이듬해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랐다.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 등을 제작했다.
-강금실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비서실장은 어쩌다 한 겁니까.
“민변 후배이고 도울 사람이 필요한 상황인데, 마침 저는 변호사를 휴직하고 ‘영화사 봄’으로 이직하는 상황이라 그사이에 합류해 뛰게 됐어요.”
대선 등 네 차례의 선거캠프 참여
낙심한 마음 안정 위해 소설 집필
새 작품에도 선거 속 인물 그릴 것
-2012년 18대 대선에선 안철수 후보의 비서실장이었지요.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안철수 후보 경선 캠프 비서실장을 맡았고요.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까.
“2012년 송호창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의 주선으로 안 후보를 만났어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돕기로 했어요. 그러다 서로 간 신뢰가 생겨 그가 서울 노원병에 출마해 당선된 2014년 재보궐선거와 2017년 대선도 도운 거예요. 정치와 선거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이후 인간적 관계는 유지하되 정치적 관여는 안 하고 있어요. 저는 안철수 의원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시장선거와 대선에서 지지한 후보가 연거푸 낙선해 상심이 컸겠군요.
“실은 2017년 대선에서 진 슬픔 때문에 소설을 쓴 겁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마음은 쓸쓸해서 그동안 썼던 칼럼을 모아 책을 내야 하나 살피다 몇년 전에 써놓은 <리셋> 스토리를 다시 읽게 된 거죠. 마음의 안정을 위해 집필에 매진했어요.”
소설 <리셋>은 주인공인 변호사 ‘강동호’가 현직 서울시장의 의뢰를 받아 전임 시장과 유력 정치인의 비리 의혹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조사 과정에서 권력과 금력의 추악한 거래를 발견하면서 오히려 피의자로 몰린다. 그는 있을 법한 이야기를 스릴 있게 그렸다.
-네 차례 큰 선거를 치르면서 겪은 일들이 집필에 큰 도움이 됐겠어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선거는 인간의 욕망이 가장 들끓는 시공간이에요. 특히 전국적인 선거인 경우에는 언론보도 하나하나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굉장히 드라마틱한 경험을 하게 되죠.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고요. 거기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아요.”
-<리셋>도 판권이 팔렸습니까.
“가까운 영화 제작자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계약 없이 허락했는데, 그분이 시나리오 단계에서 멈췄어요. 그래서 <리셋>의 모든 판권은 저에게 있어요.”
-영화사에서 보낸 3년은 어땠습니까.
“문화예술이나 영화에 대한 로망이 있어 영화사 봄 설립자인 오정환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데, 성과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영업이 더 안 되는 악순환이 오고…. 그래서 2009년 변호사 업무를 다시 시작한 거예요(웃음).”
조 변호사는 2009년부터 강금실 전 장관이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원’에 소속돼 있다. 여전히 조 변호사가 맡는 사건의 70~80%는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문화예술 분야다. 최근에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쿠팡플레이를 상대로 저작인격권 소송을 제기한 드라마 <안나>의 각본·연출자 이주영 감독을 법률대리하고 있다. 이 감독은 쿠팡 측이 감독의 허락 없이 8부작 드라마 <안나>를 6부작으로 일방적으로 재편집해 작품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바쁜 와중에 주로 언제 글을 구상하고 쓰나요.
“글은 평일 저녁에 한두 번, 주말에 한나절 정도 써요. 집이나 집 근처 카페에서 주로 쓰죠. 구상과 메모는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해요. 집이 있는 용산구 삼각지에서 사무실이 있는 서초구 뱅뱅사거리까지 버스를 이용하는데, 50분 정도 소요되거든요. 또 저는 매 주말 남산 트레킹을 해요. 마을버스를 타고 후암동에서 내려 하얏트호텔까지 걷죠. 그때 남산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책을 읽거나 온라인으로 택배대출한 책을 반납하는 것도 일상이 됐어요.”
-지금 쓰고 있거나 기획한 새 작품이 있습니까.
“두 편이 있는데, 하나는 콘셉트가 강해 보안을 유지해야 할 것 같고요. 다른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가의 이야기예요. 정치 등 우리 사회에 상당히 깊고 넓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도시의 은자(隱者)로 살아가는 인물이죠. 제가 선거를 하면서 흥미롭게 지켜본 직종이에요.”
-앞으로 인생의 그림은 어떤 건가요.
“저는 변호사 업무를 생업이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일들을 계속해나갈 거예요. 또 시간을 잘 할애해 소설과 각본을 쓰는 일도 계속할 생각이에요. 2018년 후배 둘과 함께 영화제작사 파이엔터테인먼트를 차렸으니 여기서 제가 쓴 작품으로 영화도 제작해야겠죠(웃음).”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