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이후 신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칼럼을 쓰게 됐다. 한곳도 아니고 무려 세곳이었다. ‘피렌체의 식탁’과 ‘미디어 오늘’, 주간경향에서 제안이 왔다. 모두 받아들였다. 초라한 역량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이었지만, 현장노동자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주, 넓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 사이 로템 하청업체를 나와 다른 용접 회사로 이직했다. 볼보 하청업체였다. 회사 내부는 완벽하게 남초라 여성 경리직원 한명 찾아볼 수 없었다. 외국계 기업인 탓인지, 아니면 노조 활동을 하셨던 사장님 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임금은 원청과 비슷하게 받을 수 있었다.
가려진 ‘진짜’ 현실
내 업무는 포클레인의 팔 파츠(회사에선 붐, 암으로 불렀다) 용접이었다. 이제껏 해왔던 모든 용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일반 용접기보다 훨씬 무거운 손잡이를 들고 전장 5m에 달하는 길이를 메워야 했다. 어찌나 두텁게 때우는지 아래부터 위까지 비드층만 11단을 쌓아야 했다. 자동차 커뮤니티에 떠도는 볼보차=금강불괴의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품질관리도 엄격해 조금만 실수해도 귀가 떨어지도록 욕을 먹었다. 와중에 키가 유달리 컸던 한 형님은 그 긴 구간 용접을 끊지도 않고 단번에 때우곤 했다. 허리와 팔꿈치가 남아나질 않는 일 방식이었다. 왜 그리 힘겹게 하냐 물으니, 형님은 머쓱하게 웃어 보이고선 “이래 때아 놓으면 멋지다 아이가” 했다.
그 목소리엔 용접사의 자부심과 멋스러움, 흡사 조각사나 화가 같은 예술인의 긍지가 느껴졌다. 경외감을 느낀 것도 잠시, 야간까지 용접하다가 문득 팔이 심하게 저렸다. 서른두 살에 드디어 대기업 초임을 받나 싶더니, 이젠 빚 갚느라 무리했던 몸이 문제가 됐다. 저릿한 감각이 도통 사라지질 않아 정형외과를 갔더니 목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4·5번 경추뼈가 붙어 있는데다 바로 아래 디스크까지 압박받고 있었다. 아래 보기 용접 자세로 오랫동안 일해온 게 문제였다. 이 상황을 대비해 줄곧 등 운동과 스트레칭을 병행했건만 빚에서 헤쳐 나오는 동안 혹사했던 몸 건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픈 도중 KBS의 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지방선거에 이어 ‘이대남 현상’의 최대 수혜자인 이준석씨가 당대표가 되며 청년담론이 재조명받았다. 특히 그가 열렬히 주장하던 공정담론이 한참 동안 인터넷을 달궜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제조업 현장과 지방에서 느낀 생각을 말했다. 산재와 저임금이 도사리는 정체된 미래와 체념의 세계를 설명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다. 공룡과 토끼가 같은 룰로 싸우는데 뭐가 공정이냐고. 애초에 비정규직을 뽑는 것 자체가 불공정 아니냐고.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다 털어놓았다. 이날의 인터뷰는 KBS <시사기획 창>을 통해 알려졌다. 유명 프로그램이었고, 내 발언도 유독 길게 나와 한순간에 유명인이 됐다. 지인들은 물론 동네에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좀 머쓱했다.
이후 이런저런 연락이 많이 왔다. 출판, 방송, 강연, 사적인 만남과 정치적인 부름까지 다양했다. 그중 단연 큰 이벤트는 국무조정실의 연락,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 제안이었다. 그간 바쁨을 방패삼아 온갖 제의를 물려왔지만 이것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사실 늘 세상을 좀더 좋게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좀더 좋은 세상이란 노동이 단지 생존을 위한 수렵활동처럼 여겨지지 않는 세상,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세상이었다. 대한민국은 청년에게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부동산과 비트코인이 대표하는 불로소득을 방치했고, 계층 사다리를 파괴해 공기업 공무원 대기업에 들지 못한 청년들을 패배자로 만들었다. 이 구조를 바꾸려면 칼럼 지면에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하여 평범한 청년공은 국무총리실, 비범한 이들만 도사리는 그 무대에 올라섰다.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평범한 삶’의 힘
그간 내 시선으로 본 정치권에서의 노동이란 주인공 없는 소설이었다. 한 조연은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 전문가들을 앞세워 혹세무민만 반복했다. 다른 조연은 어리숙하고 정의감만 넘쳐서 늘 악역이 원하는 데로 끌려가기만 했다. 권력의 추는 좌우로 요란하게 진자운동을 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 공허한 언어만 떠도는 세계관 속. ‘집 한채 아이 둘 가장’의 평범함에 편입되길 꿈꿨던 스무 살 청년공은 결국 현실의 성벽 너머 기다리는 꿈을 거머쥐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보낸 청춘을 그저 무력, 절망, 박탈, 분노, 냉소로만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10년간 일한 경험을 어찌 나쁜 감정으로만 묘사할 수 있을까. 처음 주야 일하면서 먹었던 보름달 빵의 맛, 해가 솟아오르는 마산만의 풍경, 안전 모범 사례로 받았던 칭찬과 상장, 내 아이디어가 채택돼 바뀐 현장을 보며 느낀 뿌듯함, 용접 비드가 예쁘게 나왔을 때 느꼈던 고양감이며 성취감, 내가 만드는 제품과 밖에서 마주쳤을 때의 익숙함과 반가움, 현장 사람들과 이야기 주고받으며 넓어진 내 세상은 고작 비극 따위로 뭉뚱그릴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한때는 자신이 없었다. 대다수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건 적당한 역경이 섞인 성공담 아니던가. 명문대 입학, 고시 합격, 사업 성공같이 확실한 결과물에만 열광하고 선망하는 이들은 쇳밥 먹는 삶을 ‘노력하지 않은 자들의 실패담’으로 치부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터이다. 한때는 이 현실에 분노하며 목소리 높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응! 난 공부 열심히 해서 너처럼 안 살 거야!” 같은 냉소 어린 반응뿐이었다. 한국은 시험 만능주의에 중독돼 있었다. 언론은 고시와 취업 준비에 목숨 거는 삶을 조명하며 그들이 마치 청년의 표준인 양 말했다.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이 대표하는 15%의 삶 외엔 전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우습게도 85%의 삶에 대한 글을 쓰고자 마음먹게 된 계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냉소 넘치는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에 올린 글 덕분이었다. 빚, 용접, 공장, 노가다, 운동을 눌러 담은 그 게시물에 응원 댓글이 줄줄 달리더니 급기야 10만 조회수를 넘겼다. 그때 알았다. 사람들은 평범한 삶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걸. 머리 위로 조명이 비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주목받을 수 있다는 걸. 그 사실을 몸으로 느낀 순간 다시는 펜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오늘도 작업복 입고 쇳밥을 먹으러 통근버스에 오른다. 평범한 이들의 노동과 삶이 오롯하게 대우받는 날이 오기만을 기원하며.
<천현우 용접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