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더망에 걸린 고무신? 물가대책의 역사

박상영 경제부 기자
2021.11.15

문민정부 출범 후 정부 물가 개입 중단… 현재는 금리 통해 물가조절

인플레이션의 귀환. 올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012년 이후 9년 만에 2%를 넘어설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부에도 비상이 걸렸다. 10월에는 물가 상승률이 약 9년 만에 3%대를 기록하면서 하반기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정부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난 10월 2일 서울 망원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0월 2일 서울 망원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8월까지만 해도 정부는 농수산물 가격과 유가만 잡히면 물가가 안정세에 접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유가는 여전히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가공식품 가격까지 줄줄이 오르면서 체감 물가는 더 높아졌다. 여기에 전기료를 시작으로 지하철, 수도요금 등 각종 공공요금 인상 요구까지 거세지면서 다급한 정부는 연말까지 ‘공공요금 인상 차단’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원유, 달걀 등 국민이 자주 이용하는 품목의 가격 결정 구조도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물가관리는 정부의 최우선 정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관리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였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최초의 물가관리제도는 1946~1947년에 걸쳐 주요 상품을 대상으로 한 ‘최고가격제’였다. 정부가 가격 상한선을 직접 정하는 강력한 물가관리 수단이었지만 해방 직후, 취약한 행정력으로 실효성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세청·경찰 동원해 ‘물가 조정’

1960년대 초반 군사정권은 물가급등이 이어지자 ‘물가조절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했다. 당시 정부는 행정지도라는 명목으로 국세청과 경찰을 동원해 물가를 단속하고 가격을 통제했다. 이 같은 정책기조는 197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다. 1973년 8월 16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정부는 추석을 앞두고 물가관리를 위해 전국 세무서와 경찰서에 물가 단속반을 설치했다. 부당한 가격 인상, 유통 과정에서의 가격 조작, 출고 조절 등이 단속 대상이었다. 경제기획원 당국자는 “적발되면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을 통해 처벌하는 동시에 초과 이윤에 대해서는 세금을 통해 흡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가격 담합 등 과도한 가격 인상 징후가 발견되면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구두 경고에 그친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농산물 등 정부 비축 물량을 푸는 것과 달리, 국민이 자주 구매하는 품목의 공급량을 직접 정부가 조정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조미료, 세탁비누, 고무신 공급량을 조절하고 생산 공장도 공휴일에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소 도축 규모를 하루 330마리로 정하기도 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1973년 3.5%에서 1974년에 24.8%로 수직 상승하자 정부는 행정지도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산업구조가 에너지 수요가 많은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던 만큼 충격은 더 컸다. 이에 정부는 ‘가격사전승인제’를 발표했다. 1973년 12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정부는 쌀, 밀가루 등 생필품뿐 아니라 시멘트 등 주요 원자재를 포함 61개 품목 값을 조정할 때에는 반드시 주무부처나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정부의 허용 없이는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정부가 지정하지 않은 품목에 대해서도 한 번에 5% 이상 가격을 올리는 경우에는 경제기획원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다.

1980년대는 물가정책이 규제에서 자율로 바뀌는 분기점이었다. 주요 품목 가격을 정부가 규제하는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에서 독과점 기업의 부당한 가격 인상을 제어하는 간접적인 방식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국가의 경제정책 방점이 바뀐 영향도 있었다. 정부 지출을 통해 성장에 방점을 뒀던 1970년대와 달리, 1980년대는 경제 안정화에 초점을 뒀다. 당장, 정부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산을 동결했다. 그 결과, 1960년대 12.1%, 1970년대에는 13.4%였던 물가 상승률이 1980년대에는 5.4%로 낮아졌다.

고물가보다 경기침체 걱정해야?

경상수지 흑자에 더해 그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가 분출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물가는 다시 빠르게 올라갔다. 1988~1992년 중 연평균 명목임금 상승률이 거의 18%에 달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공공기관 적자로 공공요금 인상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과거와 같은 가격규제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웠던 만큼 당시 노태우 정부는 통화안정증권 발행을 통해 통화량을 흡수하고 200만가구 건설을 통해 부동산 가격안정을 유도해 1991년 9.3%까지 올랐던 물가를 1993년에는 4.8%까지 낮췄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물가 개입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2015년 국회입법조사처의 ‘입법과 정책’에 실린 논문 ‘물가관리 정책 변화와 효과분석: 한국 사례연구’는 “김영삼 정부는 관치경제를 개혁하기 위해 탈규제와 경제자유화를 추진, 물가에 대한 정부주도의 규제정책도 공식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이제는 한국은행이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관리에 주도권을 쥐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가공식품 담합인상 모니터링 강화나 농·축·수산물 수급안정대책으로 가격을 안정화하기에는 경제 규모는 급속도로 커졌다.

현시점에서 물가를 잡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금리 인상이라는 점에 누구나 동의한다. 다만 경기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리 인상은 자칫 경기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금리 인상을 막고 있다.

특히 과거 위기와 비교해 긴축의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점은 이 같은 우려에 힘을 싣고 있다. 2013년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 논의가 시작된 당시에는 미국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목표치인 2%대를 밑돌았다. 그러나 2021년에는 물가상승률이 5개월 연속 5%대를 웃돌고 있다. 주혜원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높은 인플레이션 현상이 지속되는 것은 테이퍼링에서 첫 금리 인상까지의 기간을 단축시킨다는 점에서 금융시장에 더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2013년에는 미국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 등 상당수 국가의 중앙은행은 완화적인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했지만 올해에는 한국을 비롯해 노르웨이, 러시아, 브라질, 멕시코 등이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경기 둔화가 현실화되면 현재의 물가 상승세도 꺾일 수 있다. 다만 침체의 늪은 깊어질 수 있다. 내년이면 물가 상승보다 오히려 경기 둔화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박상영 경제부 기자 s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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