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정용인 기자
2021.10.25

<라쇼몽>과는 다른 리들리 스콧표 연출

감독의 연출 의도는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의 상대성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은 <라쇼몽>과 결정적으로 다른 길로 간다.

제목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The Last Duel)

제작연도 2021

제작국 미국, 영국

상영시간 153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개봉일 2021년 10월 20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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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쇼몽>일까. 첫 번째 챕터, 장 드 카루즈의 입장이 상영될 때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감독이 리들리 스콧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못지않은 거장이다. 분명 <라쇼몽>을 염두에 두겠지만 다른 길을 갈 것이다.

영화가 <라쇼몽>처럼 등장인물 세 사람 각자의 관점에서 묘사하는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장 드 카루즈(맷 데이먼)와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는 오랜 친구다. 전투에서 카루즈는 위험에 처한 르 그리를 구해준다. 카루즈는 한때 영국에 붙어 프랑스 국왕을 배신한 경력이 있는 성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르 그리는 카루즈가(家)보다 신분이 높은 영주 달랑송 백작(벤 애플렉)의 최측근이 돼 세금을 걷으러 다닌다. 그는 카루즈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가 결혼지참금으로 카루즈에게 줄 예정이었던 땅을 미납세금 대신 뺏는다. 백작을 찾아간 카루즈는 불만을 터뜨린다. 한때는 둘도 없는 관계였건만, 자신을 배신하고 영주의 아첨꾼으로 전락한 친구에게 실망한다(이건 카루즈의 관점이다).

세 주인공의 관점으로 본 ‘사건’

사건은 그가 스코틀랜드 전투에 나갔다가 자신만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돌아왔을 때 벌어진다. 프랑스 국왕을 만나 상금을 받기 위해 파리에 간 사이, 르 그리는 혼자 성을 지키고 있는 마르그리트를 찾아간다. 르 그리가 마르그리트를 처음 본 것은 화해하기 위해 찾아온 자리였는데, 틈만 나면 여성들을 건드리는 난봉꾼이었건만 그는 첫눈에 반한다. 르 그리의 사랑 고백은 실패했고, 도망치는 마르그리트를 쫓아 침실까지 쳐들어가 강간한다(이건 카루즈와 마르그리트의 관점이다. 르 그리는 “그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화간이라고 주장한다). 파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르 그리에게 겁탈당했다고 고백한다. 백작은 자신의 측근 르 그리 편을 들 것이 뻔한지라 남편은 국왕에게 사건을 가져간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프랑스 국왕이 주재하는 결투장면이다. 상반된 진실이 주장되는 가운데, 이런 경우 결투의 승자가 진실한 주장이자 신의 뜻이라고 정하는 것이 중세시대에 통용되는 법칙이다. 결투엔 승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결투에서 죽은 사람, 즉 패자가 있다. 남편 카루즈가 지는 경우 진실은 불륜으로 확정된다. 그 경우 마르그리트는 산 채 화형에 처해지는 불륜녀가 된다. 부부가 다 죽는 것이다. ‘물에 빠뜨려 죽으면 사람이고 살아나면 마녀’라는 마녀재판이나 이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그리트가 택한 것은 명예다. 두 남자의 결투에서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

중세시대 사건에 빗댄 미투?

앞서 <라쇼몽>을 거론했지만, 화자에 따라 영화의 시각이 딱히 달라진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 의도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누가 진실인지 알기 어려워져 버렸다’는 진실의 상대성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리들리 스콧은 이 점에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연출 의도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개척한다. 진실은 명확하다. 르 그리가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고 미화하더라도 겁탈은 겁탈이고, 마르그리트의 의지에 반해 강제로 강간을 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 사람의 시각에 따라 카메라 시점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연출 세부 내용도 미세하게 달라졌다는 점이 어렴풋이 느껴지는데, ‘팩트’와 관련해서는 거의 차이가 없이 묘사하고 있다.

과거 감독이 연출한 사극 영화들이 “주인공을 현대사회의 민주투사처럼 만들어버렸다”는 비판(<글래디에이터>(2000), <로빈 후드>(2010)가 대표적이다)이 있는데, 이번 영화 역시 최근 할리우드를 휩쓴 미투 열풍을 중세시대 사건에 빗대 투사했다는 비판도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시 거장이 괜히 거장 소리를 듣는 건 아니다.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인트로의 결투가 누구의 승리로 끝났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영화의 결말을 보며 사람들이 떠올릴 그로테스크와 광기, 낯섦과 같은 묘한 감상은 천상 영상을 통한 스토리텔러로 최고 경지에 오른 감독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각본을 집필하고 영화에 같이 출연하는 것도 <굿 윌 헌팅> 이후 24년 만이다.

승자는 무죄! ‘결투재판’은 진짜 있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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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판타지게임에 흔히 등장하는 결투재판(Gerichtskampf)은 역사적으로 실제 행해지던 싸움이다. 주로 게르만법 전통에서 행해지는 일이라고 하는데, 야만적이라고 하기에는 증언이나 증거가 부족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힘든 경우 행해지던 재판이다. 사실 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간사건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아무도 없는 성안의 침실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목격자가 없다. 양자의 주장이 엇갈린 가운데 누가 사악한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르 그리가 바람둥이인 건 자타가 공인하는 듯하지만, 과거 이런 사건으로 송사에 휩쓸린 적은 없는 듯하고. 결국 진실을 규명하는 임무를 두 사람의 결투의 결과에 따라 신의 뜻에 맡기자는 것이다. 진실을 주장하는 쪽에 신의 간지(奸智) 같은 것이 임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다. 에이 그게 말이 되냐, 라고 말하기 전에 모든 만물에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믿던 중세시대 유럽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중세시대의 결투재판을 정리한 문서들을 보면 그렇다고 아무나 대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나 기력이 없는 노인 등은 결투할 수 없으며, 농노 역시 이 제도에 참여할 수 없다. 아이나 노인 등은 자신 대신 싸워줄 전사를 고용할 수 있다. 판타지소설 등을 보면 흔히 등장하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대전사(代戰士)라 하며 영어로는 챔피언이다. “신의 뜻에 따라 진실을 가린다”고 하지만 사실상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재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미 13세기부터 교황이 나서서 “이런 재판은 적법하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근절되지 않았다. 실제 마틴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면서 개신교가 대두되자 자체개혁을 위해 연 세 번째 트리엔트 공의회(1562년)에서야 완전 금지됐다고 한다. 논의에서부터 금지까지 300여년이 걸린 셈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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