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여유 시간대를 확인해 업무 미팅 시간을 확정하는 일은 꽤 번거롭다. 몇 차례의 전화통화, 캘린더, 일정의 중복 여부 등 하나하나 체크하며 조율해야 한다. 이 미팅에 참여하는 인원이 10명 이상이라면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된다. 그렇다고 일정 조율만 전담하는 인원을 두기도 어렵다. ‘누가 대신해주면 안 될까’ 고민에 빠지는 직장인은 분명 한둘은 아닐 것이다.
경비 지출을 증빙하고 지급을 요청하는 과정은 또 어떤가. 직장인들의 핵심 업무는 아니면서도 은근히 시간을 빼앗기고, 분노를 유발하는 까다로운 잡무 중 하나다. 영수증을 첨부하고 증빙을 위한 각종 공란을 채워가며 상사의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매번 반복되는 이런 업무를 제출하는 쪽도 이를 승인해야 하는 쪽도 모두가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이 로보틱 업무프로세스 자동화(이하 ‘RPA’) 시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배경이다. 올초 발표된 가트너의 보고서를 보면, RPA를 포함한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은 올해 8.8%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2022년에는 성장세가 더 가팔라지면서 1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비용을 줄이면서 업무 효율화를 꾀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업들 사이에서 각광받는 중이다.
RPA는 물리적 로봇이 아닌 디지털 봇의 형태로 우리 직장 안으로 침투한다. 처음은 가벼운 반복 업무를 대체하는 수준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점점 더 똑똑해지면서 직장인 업무의 일부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고위 임원의 의사결정 업무도 일부 대체 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 이 업계의 평가다. 아주 대단한 AI 테크놀로지를 녹이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쉽게 구현할 수 있어 보편화도 제법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적지 않은 국내 대기업들도 이 분야 선두 기업인 유아이패스(UiPath)의 디지털 봇을 도입해 업무 자동화를 꾀하고 있다.
봇의 습격은 생산직, 사무직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처음엔 ‘혼종 노동자’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인간-기계 협업 구도가 강조됐지만, 서서히 그러한 낭만은 사라지는 분위기다. 분명 RPA는 직장인들의 로망이랄 수 있는 ‘워라벨’의 기초 조건이다. 하지만 팬데믹을 거치면서 RPA의 능률과 속도는 노동의 대체를 가속화할 만큼 한층 향상됐다. 워라벨을 위한 해방군으로 여겨졌던 디지털 봇이 지금은 내 책상의 존재를 결정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는 중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1년 11월 “기계가 똑똑해져서 노동자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시 말해 자본이 노동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RPA를 직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한가지는 분명하다. 반복·단순 업무로 연명해온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직장 내 설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핵심적이고 창의적인 업무가 아니라면 더 이상 회사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재간이 없어질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에서 적당히 단순 업무를 반복하며 퇴직까지의 안온함을 기대할 수 있었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성규 미디어스피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