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자식의 뜻 기리는 이 시대 이소선들

이하늬 기자
2020.11.16

가혹한 노동 현실 때문에 세상 떠난 김동준의 어머니와 이한빛의 아버지

전태일의 죽음은 이소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이소선은 이후 41년을 운동가로 살았다. 이소선은 “더 이상 죽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청년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이제 그들의 부모가 이소선이 갔던 길을 걷는다. 2020년의 이소선들이다. CJ 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사망한 김동준의 어머니 강석경, CJ E&M에서 사망한 이한빛의 아버지 이용관을 만났다.

지난해 ‘전태일 열사 49주기 행진’ 행사에 참가한 시민이 전 열사의 얼굴 모습이 비치는 촛불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전태일 열사 49주기 행진’ 행사에 참가한 시민이 전 열사의 얼굴 모습이 비치는 촛불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강석경은 ‘그냥’ 살아왔다고 말했다. “삶이 그렇잖아요. 맨날 좋은 건 아니잖아요.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닌데 손 벌릴 정도는 아니어서 지낼 만했어요.” 다만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남편이 무기계약직이라 정규직이 될 방법이 없을까? 정도가 고민이었다. 비정규직은 시험에 떨어졌으니, 임금이 적은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숨져

2014년 1월 20일, CJ 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아들 김동준이 기숙사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산업재해라는 생각은 못 했다. 본인의 선택이라서다. 그러다 아들의 휴대전화를 보고 혹시 산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투신 전 김동준은 담임교사에게 “선생님… 저 무서워요”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김동준이 “차라리 죽었으면 편했을걸, 나는 왜 시발 살아 있어서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죠?”, “내가 뭘 잘못해서 엎드려 뻗치고 신발로 머리 밟히고 까이고 당해야 하나요”, “저는 너무 두렵습니다. 내일 난 제정신으로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요?”라고 쓴 글도 발견됐다. 그 날 강석경은 ‘그냥’은 살 수 없는 사람이 됐다.

특성화고를 선택한 건 아들이었다. 부모는 반대했다. 이를 두고 3~4개월을 싸웠다. 아들은 특성화고가 공부, 취업, 군대까지 해결하는 ‘세 마리 토끼’라고 했다. 결국 부모가 졌다. 김동준은 학교에서 호른을 배웠고, 열기구를 타러 일본과 중국에 갔다. “엄마, 학교가 너무 재미있어. 그런 결정을 한 내가 자랑스러워.”

김동준이 좋아했던 학교, 장례식이 끝나자 연락이 끊겼다. 이에 대해 장윤호 특성화고 교사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학교에서는 현장실습생 사고가 나면 언론에 학교 이름이 나가기 때문에 싫어한다. 다음 해에도 그 업체에 아이들을 보내야 하는데 학교에서 업체 하나 관계 맺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다.

현장실습생 산업재해 늘 비슷하다. 학교는 회사에, 회사는 학교에 책임을 미룬다.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강석경은, 남편의 반대에도 산재를 신청했다. 회사는 돈을 이야기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돈으로 따지면 10억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게 언론에 “유족, 10억 요구해”로 보도됐다. “이게 내가 이전에 알던 세상이 맞나?” 싶었다.

CJ 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사망한 김동준의 어머니 강석경씨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북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선재 제공

CJ 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사망한 김동준의 어머니 강석경씨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북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선재 제공

어렵게 산재가 인정됐다. 현장실습생의 자살이 산재로 인정된 첫 케이스다. “마음이 가벼워졌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그런 시도를 하기도 했고…” 그즈음 돌베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김동준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동준이가 엄마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그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그 결과물이다.

책 작업을 통해 이민호 유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이민호는 제주의 한 생수 제조업체에서 숨진 또 다른 현장실습생이다. 두 가족의 모임이 작은 불씨가 돼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만들어졌다. ‘다시는’ 활동을 통해 강석경은 또 다른 세상을 봤다. 거기에는 소리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

강석경은 이소선은커녕 전태일도 잘 몰랐다. ‘뭘 외치고 분신한 사람이 있었다’ 정도로 알았다. ‘다시는’ 사람들과 모란공원에 갔던 날, 이소선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전태일평전>을 사서 읽었다. “전태일이 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나쁜 사회였겠죠? 사회가 바뀌기 위해 누군가 무엇을 해야 한다면, 내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활동은 힘들다. 전국을 다니는 게 힘들고 아들의 죽음을 말하는 게 힘들다. 계속 현장실습생들이 다치고 죽어서 힘들다. 변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속이 터진다. 그런데 그걸 안 하면 더 힘들다고 했다. ‘그냥’ 살면 죄를 짓는 것 같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도 동료 김주익을 떠나보낸 뒤,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켜지 못한다고 말한 적 있다.

이날 인터뷰를 끝내고 강석경은 말했다. “동준아, 오늘도 엄마는 한다. 오늘도 너한테 떳떳하게 뭔가를 하고 왔어.”

CJ E&M에서 사망한 이한빛의 아버지 이용관씨가 전태일과 이한빛을 합성한 사진 앞에 서 있다. / 이석우 기자

CJ E&M에서 사망한 이한빛의 아버지 이용관씨가 전태일과 이한빛을 합성한 사진 앞에 서 있다. / 이석우 기자

이용관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다. 대학 때 운동권은 아니었다. ‘삐라’를 뿌리는 쪽보다는 친구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을 보며 혼자 우는 쪽이었다. 비겁하다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교육현장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교사가 되자마자 ‘소모임’에 들어가 전교조 설립에 함께했다. 아내도 전교조에서 만났다.

이한빛이 태어나던 해, 이용관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1994년 복직할 때까지 5년 동안 전교조 정책위원장, 참교육 연구소 소장 등을 맡았다. 활동을 하며 이소선과 자주 스쳤다. 자식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살 수 있을까? 참 대단하다. 슬픔보다 존경의 마음이 먼저 일었다. 남의 일이라 여겨서다.

부모의 영향일까. 아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한빛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이한빛은 참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KTX, 기륭전자, 이랜드, 세월호… “부모 마음이 간사해요. 기특하고 대견스러웠지만 너무 그쪽에 열심히 하니까 걱정이 됐죠. 자기 잇속도 좀 챙겼으면 했어요.” 이한빛은 활동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부모는 아들이 교수가 되길 바랐다.

아들은 어느 날 PD가 되겠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 활동하는 이들을 지원하겠다는 이유였다. 작품으로 사회적인 메시지도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2016년 이한빛은 tvN에 합격했다. 실제 월급을 받자마자 여러 단체를 후원했다. 후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 아홉 달 만에 이한빛은 한 호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중략)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이용관은 아들의 죽음이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항거하고 고발하는 죽음이라고 판단했다. 싸우려면 힘 조절을 잘 해야 했다. 장례는 빠르게 가족장으로 치렀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설립

가족은 산재 인정보다 이한빛의 뜻을 잇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6개월 동안 회사와의 협상이 이어졌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공개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이다. 그리고 이면합의가 있었다. 가족은 보상금 전액을 내놓을 테니 회사도 같은 금액을 출연하라. 그것으로 방송노동자를 위한 기금을 만들자. 그렇게 2018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만들어졌다.

이용관은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에 빠져산다. 한빛센터가 없었으면 폐인이 됐거나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실제 회사와 협상을 이어갔던 6개월, 이용관은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술 없이 못 살았다. 간에 농양이 생겨 응급실로,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한빛센터는 내가 애한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거니까. 이거라도 해야 내가 덜 아파요.” 김동준의 어머니 강석경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다.

센터 일에 빠져사는 건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전에는 화려한 화면 뒤에 열악한 노동이 있는 줄 몰랐다. 학생들 진로상담을 할 때면 ‘영상, 문화 산업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영상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린다’며 권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건 직업이 아니야. 노예야 노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내가 애들한테 사기 친 꼴이 된 거예요.”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금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개되지 않은 유서에서 이한빛은 그 와중에도 ‘후원’을 부탁했다. 단체 이름은 나열하지 않고 ‘엄마·아빠가 다 잘 아실 테니 후원을 해달라’고만 쓰여 있었다. 그래서 이용관은 후원 거절을 못 한다. 연금으로 생활하는데 빠져나가는 후원금만 매달 40만원이 훌쩍 넘는다. “어디 어디를 후원해라, 이렇게 써놨으면 얼마나 편해.” 인터뷰를 하며 이용관이 처음으로 웃었다.

전태일 50주기, 이용관은 이소선을 생각하면 이제 존경보다는 슬픔부터 인다.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소선 어머니가 먼저 ‘이런 길이 있다’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쉽게 이 길에 뛰어들 수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이소선처럼은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죠.”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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