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 영국 벤처캐피털 기업 ‘MMC 벤처스’는 유럽 내 2830개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한 ‘AI 기술 현황 2019’ 연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놀라웠다. 조사 대상 기업의 40%가 머신러닝 등 AI 기술을 전혀 활용하고 있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도 있다. 있지도 않은 AI 기술을 투자자들에게 강조하며 평균 15% 이상의 투자금액을 더 끌어모았다는 점이다. 유럽판 AI 거품의 전조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저마다 자체 평가 결과를 제시하며 “우리 AI 기술의 인식 정확도는 95%를 상회한다“고 홍보하는 스타트업들이 넘실댄다. 특히 의학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현란한 기술적 수사와 그래프 플로트는 고정 레퍼토리다. 인식 정확도 90% 후반대는 웬만한 기술자본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다. 하지만 언론은 이들을 거들고 부추긴다. AI 스타트업의 레토릭을 ‘팩트’로 받아 적는다.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검증할 실력이 없다 보니 여과되지 않은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기사를 접한 독자들은 흥분하고, 낭만적인 미래를 상상한다. 요술봉도 이런 요술봉이 없다. AI 기업이라면 쌀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2018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존 랭포드 박사는 AI 거품을 우려하는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특정 인공지능 학회지에 쏟아지는 논문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동료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들며 위험 징후를 설파했다. 매끈한 스토리를 갖추기만 하면 투자자로부터 돈을 쓸어담고 있는 현상도 꼬집었다. 이대로라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AI 거품은 터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얼마 전 우리 정부는 제2의 벤처붐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무려 12조원을 시장에 풀겠다고 했다. 경기 하강국면이 뚜렷해지면서 정부가 내린 단기 처방이다. 이미 시장에는 AI 스타트업을 위한 돈이 적잖이 흘러드는 중이었다. 정부의 발표는 봄비 규모의 투자를 여름철 폭우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신호다. 환영할 만하지만 우려되는 대목도 적잖다. 12조원에 달하는 돈의 일부는 분명 AI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다수의 스타트업에 유입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을 투자 단계에서 거를 수 있는 검증 주체가 국내엔 그리 흔치 않다. 전문 연구자들조차 혼란을 겪을 정도다. 여기에 언론의 부풀리기 보도까지 결합되면 AI 거품은 금세 부풀어 오를 수 있다.
2000년대 초 국내 닷컴버블을 떠올려보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벤처기업에 대한 과도한 지원이 뒤따랐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과 비즈니스에 돈다발을 몰아줬다. 웹(1.0), 인터넷이라는 수식어만 붙어 있으면 대학원생 몇 명만 모여도 수억 원 투자를 유치할 수 있던 그런 때였다. 하지만 거품은 몇 년 가지 않아 붕괴됐다. 주가조작 등을 포함한 4대 게이트가 터졌고, 연루된 벤처기업인들이 줄줄이 수갑을 찼다. 물론 닷컴버블은 쭉정이 벤처기업을 걸러내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실패라는 데이터는 학습의 중요한 자산이다. AI로 촉발된 벤처 시장의 건강한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실패의 자산을 충분히 숙지하고 신중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AI 기술 없는 AI 스타트업이 수많은 투자금과 눈먼 돈을 쓸어담는 불상사가 없으려면, 정부도 내공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 실패는 죄가 되지 않지만 실패에서 배우지 못한 건 죄가 될 수 있다.
<이성규 메디아티 미디어테크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