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1930년대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시대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통한 문명화와 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걸 추구하였다.
민주화 이후 한국개신교의 지형도는 변했다. 진보 기독교를 대표하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문호 개방을 통해 점차 보수화되었다. 반면, 한기총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기독교는 기존의 정교분리 노선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계기로 보수 기독교는 ‘반공과 친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펼치는가 하면, 기독교 정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장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소위 ‘한국 기독교 우파’의 탄생이었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우익 대중운동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우파의 진면목은 탄핵 반대 집회에서 어김없이 드러났다. 박근혜 탄핵심판 선고기일을 앞두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십자가를 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혹자는 태극기집회를 ‘익명의 기독교운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들에게는 파시즘의 징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음모에 대한 강박관념,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반(反)지성주의, 남성주의 등등. 특히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는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징후라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 우파가 반(反)동성애와 반(反)이슬람으로 무장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파시즘의 징후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기독교 우파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것일까. 이들의 기원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주의를 받아들인 기독교라 할 수 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시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1930년대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시대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통한 문명화와 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걸 추구하였다. 이들은 문화민족주의의 주류세력으로서 교회와 기독교 기관을 통한 합법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실 기독교의 보편주의와 민족의 특수주의가 하나로 조화된다는 건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은 선교국가(미국)와 침략국가(일본)가 불일치하다보니 기독교 민족주의가 가능했다. 이들은 서구열강과 연결된 기독교를 통해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대한제국 시절 YMCA와 신민회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05인 사건과 3·1운동 등으로 이합집산을 겪은 기독교 민족주의는 미국 유학생들의 합류로 개량주의적으로 재편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흥업구락부를 중심으로 뭉친 이승만 계열과 수양동우회로 모인 안창호 계열로 나눠졌다. 이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한국 기독교의 농촌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승만 계열은 주로 YMCA 농촌사업을, 안창호 계열은 장로교회 농촌운동에 관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농촌운동을 벌인 이유에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작용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으로 인해 교회 청년들이 하나둘 떠나는 상황이었고, 세계대공황으로 농촌경제가 악화되자 농촌 교인들도 교회를 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29년 세계대공황은 식민지 조선에 농업공황을 일으켜 농촌경제의 파탄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피해는 더욱 증폭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최대 문제는 농촌경제의 위기였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신자들의 이탈을 막고, 사회주의 계열의 농민운동을 견제하고자 농촌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이들의 농촌운동이 실력양성론의 한계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합법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분배의 문제보다 생산력 증가에 중점을 두었다. <농촌청년>, <농민생활>과 같은 잡지를 발행하면서 농민 계몽활동에 많은 신경을 썼다. 요컨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농촌의 위기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했으며,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일제의 농촌 지배를 합리화시켜 주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농촌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어버렸다. 1933년 6월 윤치호·신흥우 등 34명의 민족주의자들은 “당국의 자력갱생운동에 투합”할 것을 결의하는 가운데 중앙진흥회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농촌운동은 관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체제 내적으로 포섭된 것이다.
전쟁 협력으로의 전향
식민권력에 포섭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한국 기독교가 국가주의를 내면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1937.6)과 흥업구락부 사건(1938.5)으로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은 본질적으로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들은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이 아니라 국민 정체성을 가진 집단주의적 개인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들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인류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신성한 질서로 여겼으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은 이들에게 자강(自强)에 대한 강한 동기를 부여하였다. 유의할 점은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저항의 논리’가 아니라 ‘경쟁의 논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쟁에서 패배한 순간부터 강자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들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은 국가주의와 결합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
한편, 1930년대 초반부터 파시즘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언론, 대중에게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다. 파시즘에 관한 글들이 각종 잡지와 신문에서 제법 비중 있게 다뤄졌다. <신동아>는 파시즘을 옹호하는 글을 싣는가 하면, 청년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다룬 전기를 읽고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기도 했다. 히틀러의 수기인 <나의 투쟁>을 읽고 감명을 받은 학생도 많았다. 식민권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히틀러가 흩어져 있던 독일 국민을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간 과정이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민족주의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흥업구락부 일각에서는 파시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YMCA의 신흥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적극신앙단이었다. 이승만의 측근인 신흥우는 1932년 4월 미국 여행 중 <히틀러전>을 읽다 감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그는 대공황 시기 한국 기독교를 파시즘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들은 히틀러 유겐트(나치 청소년단)를 모델로 군대식의 기독교 청소년단을 만들려고 했다. 적극신앙단의 선언과 지침을 보면, 파시즘의 냄새가 다소 풍기기도 한다. 적극신앙단은 서북 출신자들이 장악한 교권에 도전하다가 역습을 당하면서 해체되었다. 하지만 적극신앙단의 구성원들은 한국 기독교가 국가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 관여하였다.
앞서 말한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을 통해 일제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확실히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친일적 색채가 짙어졌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 회유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일제로의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제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전쟁협력운동을 주도하였다. 한 예로, 흥업구락부의 신흥우와 정춘수 목사는 혁신안을 만들어 감리교회를 전쟁 동원 단체로 만들었고, 수양동우회의 정인과 목사는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해 장로교회의 황민화를 이끌었다. 적극신앙단 멤버들은 일본 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결성하여 구약성서의 폐지에 앞장섰다. 이로써 1930년대를 풍미했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문화운동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주의의 전범(典範)으로 거듭나다
여기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 신사 참배를 적극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순천노회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급진적인 종말론으로 박해를 받은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 기독교에서 소수였을 뿐이다. 오히려 등대사(여호와의 증인)라 불리는 신흥종파가 반전을 부르짖다가 조직이 궤멸될 뻔했다.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전쟁협력운동을 거부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왜냐하면 193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교회 재산의 법적인 보호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 재산을 재단법인 명의로 등록해야 했다. 한국 기독교는 교섭위원을 보내 문제를 풀어 나갔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는 재단법인 설립을 허가받음으로써 기득권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조직의 보존과 확장을 위해서라면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국가권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한국 기독교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요구와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 이러한 모습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 7일) 이후 한국 기독교는 국가주의 담론을 전폭적으로 생산·유통하는 창구가 되었다. 특히 성전(聖戰) 담론은 한국 기독교가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논리였다. 일제는 자신들의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성전 개념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성전(Holy War)으로 치환하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기독교는 ‘일본적 기독교’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선전도구가 되어버렸다. 이때 예수는 전쟁의 아이콘으로, 사도 바울은 내선일체의 롤모델로 소비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한국 우익의 등장과 아주 긴밀하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이들은 대거 정계에 진출하였다. 안창호 계열의 인사들은 동아일보 그룹과 함께 한민당 결성의 주축세력이 되었다. 이승만 계열은 제1공화국의 고위 관료직을 역임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기반이 되었다. 이와 함께 전시체제기에 이루어진 전쟁협력운동은 한국 기독교를 오로지 국가 안보만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국가주의의 전범(典範)으로 만들었다. 반공주의와 결합된 한국 기독교는 생명과 평화의 가치보다 전쟁의 논리에 충실했다. 한국전쟁 때는 휴전을 조직적으로 반대했었고, 베트남 전쟁 때는 ‘다윗 부대’와 같이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하였다. 193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범한 과오를 되짚어 보면서 앞으로 무엇을 피하고, 경계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강성호 <한국 기독교 흑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