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의 강한 힘 덕택에 다른 동물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강한 존재가 긍정적인 영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이렇게 눈높이를 약자에게 맞추는 순간이다. 사회적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이치가 적용될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몸집은 작지만 힘 센 사람을 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흔히 짐작되는 모습이지만 실상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악당을 제압하고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바라는 강한 인물의 속성이 이럴까. 젊은 여성 주인공에게서 <말괄량이 삐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런 염원은 과거에도 다르지 않았나 보다. 개인적으로 만화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비슷한 캐릭터는 <곤>의 주인공 ‘곤’이다. 아기 펭귄 정도의 크기에 새끼 공룡의 외형이지만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생태계에서 좌충우돌하는 광경은 드라마 주인공이 힘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과 조금 겹치기도 한다.
최고 권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해
‘곤’은 생각 없이 사는 단순한 동물이다. 강한 힘 탓에 거칠 것이 없다. 온 몸은 갑옷처럼 단단해서 잘 다치지도 않는다. 공교롭게 곤란을 겪는 것은 주로 덩치만 보고 덤벼들었던 포식자들이다. 흑곰은 잡은 물고기를 뺏기는 것도 모자라, 꼼짝 못하고 ‘곤’의 침대 역할을 한다. 사자는 뒤에 올라탄 ‘곤’의 꼬리에 채찍질당하며 경주마처럼 달려야 한다. 뭣 모르고 ‘곤’을 삼킨 상어 입 안에 자리잡은 ‘곤’은 닥치는 대로 물고기를 삼키고, 그동안 상어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을 흉내 내려 애쓰거나, 약하고 어린 동물들과 장난치는 모습에 독자는 ‘곤’을 미워할 수 없다.
몇 해 전 우연히 TV에서 <곤> 애니메이션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여년 전에 보았던 만화가 갑자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아이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한동안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만화 <곤>도 버젓이 새로 출간되어 서점에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곤과 다른 동물들의 신나는 소동에 즐거워하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한편으로 과거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친구는 <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약육강식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느냐고.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모습이 불편하다고. 재미있게 읽은 만화의 편을 든답시고 대답을 했다. ‘곤’은 일반적인 먹이사슬의 외부에 자리잡은 존재라서 그렇지 않다고. 최상위 포식자의 행동을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설프고 서투른 새끼 공룡 아니냐고.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찜찜했다. 애니메이션 속 ‘곤’은 좀 더 사랑스러운 친구이겠지만 만화 속 ‘곤’은 제법 민폐를 끼치는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곤’을 떠올리며 힘의 속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근래에 사회적으로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권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해 국민들이 올바르지 못한 사용이라며 그 힘을 박탈하는 사건이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권력자가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극단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라도 힘을 행사하겠다고 단언했다. 다른 종류의 힘에 대해서도 떠올랐다.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북한의 통치자는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결정을 했다. 미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사드를 배치하기로 했고, 중국은 자신들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며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꾀하고 있다.
‘곤’은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한 존재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는 문제가 있으면 참아내지를 못 하고, 누군가가 공격하면 반드시 대응한다. 남들의 모양새가 좋아 보이면 일단은 다 따라해본다. 복잡한 생각이나 나쁜 의도는 전혀 없지만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늘 사고를 일으킨다.
약한 동물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다람쥐에게 열매 하나 뺏겼을 뿐인데 ‘곤’은 대로한다. 다람쥐를 쫓아 온 숲을 헤매다가 여기저기 부딪히며 온갖 나무를 쓰러뜨리고 개미집을 박살낸다. 원숭이도, 나비도, 개미핥기도, 뱀도 모두 곤경을 당한다. ‘곤’이 열매가 끝없이 달린 거대한 나무 앞에 도달해서야 숲의 평화가 찾아온다.
하루는 비버를 흉내 내어 거대한 댐과 집을 짓는다. 나무들은 다 쓰러져 없어지고 숲은 물이 들어차 호수로 변한다. 보금자리를 잃은 딱따구리, 코요테, 사슴, 곰들이 억울한 마음에 노려보는 중에도 ‘곤’은 호수 가운데에 위치한 나무 무더기 집 위에서 낮잠을 잔다.
콧속으로 진드기가 들어왔을 때, ‘곤’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바위에 부딪혀 보기도 하고, 낮잠 자던 사자 발톱에 문질러 보기도 한다. 물 마시던 코끼리를 메다 꽂고, 심지어 고슴도치 몸에 자신의 코를 비벼대서 모든 가시를 빼 버리기도 한다.
‘곤’에게 강한 힘이 없었더라면 이런 소동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그 본능이나 의도에 상관없이 주변에 피해를 주는 일은 늘 생기는 법이다. ‘곤’의 왕성한 식욕으로 인한 피해자도 여럿이다. 강한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하는 속성은 사회적 권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역시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희생되고 있을 것이다.
‘곤’이 그래도 사랑스러운 이유는 약한 동물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다. 남극에 간 ‘곤’은 새끼 펭귄 무리들과 함께 혹독한 겨울을 서로 도와가며 이겨낸다. 사막에서 임팔라와 원숭이, 타조를 구해 오아시스로 데려온다. 호랑이에게 어미를 잃은 늑대 새끼들을 돌보며, 머리 위에 새집을 얹고 하이에나에게 어미를 잃은 새끼새들을 키운다. 늙어 죽기 직전의 코끼리가 쓰러지자 일으켜 세워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한다. ‘곤’의 강한 힘 덕택에 다른 동물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강한 존재가 긍정적인 영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이렇게 눈높이를 약자에게 맞추는 순간이다. 사회적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이치가 적용될 것이다. 군사력 같은 물리적 힘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약자를 위한 ‘곤’의 행동이 매번 정당화될 수는 없다. 만화 속에서도 본능에 따라 사냥을 하려 했을 뿐인데 가는 곳마다 ‘곤’이 방해를 하여 굶게 된 딩고 가족 이야기가 있다. 약자 편에 선다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잃는 것이 생길 수 있다. 강한 힘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될 때에도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기 쉽다. 조심스럽게 힘을 휘두른다 해도 늘 경계할 일이다.
천진난만한 얼굴의 ‘곤’은 앞으로도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겠지만 다행히 TV 드라마 속 힘센 주인공은 이런 점을 늘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세계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길 바란다. 특히 다음 번 최고 권력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 말이다.
<신재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