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87년 민주항쟁 30년이 되는 해다. 1987년에 청년기를 보냈던 50대에게 30년 전의 기억은 특별하다. 87년 광장의 경험을 간직하고 생활현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들어보자.
1987년 6월 10일에 대한 서재영씨(53)의 기억은 특별하다. 서울 명동에서 시위를 하던 서씨는 롯데백화점 앞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은 시위를 했든 안 했든 젊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연행했다. 경찰은 서씨를 포함한 대학생 40명을 관악경찰서로 보냈다. 그때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서씨는 “보통 집회에 나오면 복장이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인데, 그 여학생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40명의 대학생은 네 명씩 분류돼 조사를 받았다. 여학생은 서씨와 같은 조였다. 여학생은 생전 처음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를 받으며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집회에 참여했다’며 있는 그대로를 다 이야기했다. 1학년 때 시위에 참여해 구속된 경험이 있는 서씨는 다음날 바로 풀려났지만,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말한 그 여학생은 일주일 구류를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7월 9일 시청 앞 광장에서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있었다. 100만명의 시민이 모인 자리에서 서씨는 다시 그 여학생을 만났다. 그게 인연이 돼 서씨와 여학생은 연인이 됐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서씨는 “1987년 하면 가장 먼저 아내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6월 10일 처음 집회에 나왔다던 아내는 이후 고 김근태 전 의원이 의장으로 있던 민평련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고, 이후 어린이도서연구회라는 NGO에서 20년간 일을 했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다양한 시민운동 세력이 생겨났고, 이러한 세력이 이후 30년 동안 한국 사회를 건강하게 바꾸려는 세력으로 자라났다고 본다. 아내 또한 6·10항쟁을 계기로 그러한 길을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서씨의 아내 오호선씨(53·여)는 “1987년 6월 10일 이전과 이후 삶이 달라졌다. 그날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고,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고민들을 생활현장에서 실천하고 노력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의 삶을 돌아보고 방법을 모색할 때 진정한 변화가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2017년은 87년 민주항쟁 30년이 되는 해다. 1987년에 청년기를 보냈던 50대에게 30년 전의 기억은 특별하다. 김미동씨(53·여)의 말이다. “1987년은 막 대학을 졸업했을 때다. 학교 다닐 때 운동권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1987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무리 소리쳐도 깜깜한 밤이 계속될 것 같은 암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1987년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일반시민들이 학생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직장인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가 받아들여지면서 ‘그래도 그들이 국민들의 눈치를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겠구나 하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그때의 경험과 기억은 이후의 삶에서 일상의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됐다. 김씨는 “1987년 이후,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생활현장 속에서 내가 맞닥뜨리고 되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각장 건설 반대운동을 했고, 생활협동조합에서 소비자운동도 했다. 의식만 앞서서 옳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내가 속한 자리에서, 우리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기득권자들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10일 이전과 이후 삶 큰 변화
1987년의 경험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지류가 돼 지금 광장의 물결과 만나고 있다. 정선애 NPO센터장(52)의 말이다. “이번 촛불집회 때 주체가 등장하는 방식이 다양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무척 취약하고 허술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촛불집회라는, 이를 다시 전복하는 힘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시민들이 지난 30년간 각자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민들이 그물망처럼 튼튼하게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가 이런 폭발적인 어젠다를 만나면서 힘을 결집시켜 나간 것이다. 1987년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가 삶의 민주주의로 전환하면서 다양한 주체와 조직운동이 확산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1987년은 ‘절반의 성공’이면서 동시에 ‘절반의 실패’였다. ‘절반의 실패’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속시켜 시민들 삶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차준원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이사(50)는 “1987년 6월, 광장이 순식간에 열렸는데, 수십만의 대열들이 일제히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단일구호를 외치는 현실은 사실상 견디기 힘들었다. 광장은 직선제가 쟁취되고 난 후 완전히 사그라졌다. 1987년 6월항쟁이 7·8·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삶의 문제, 공장에서 민주노조를 만드는 투쟁을 광장의 시민들은 엄호하거나 지원해주지 못했다. 그 결과가 계속되는 민중의 고통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김성주씨(가명·여·52)에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평등의 문제는 여전히 삶을 괴롭히는 문제다. 오히려 30년 전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다고 느낀다. “1987년은 대학 3학년이었다. 명동에서 시위를 많이 했다. 1987년 6월, 뭔가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후 대선 결과 군부정권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참담하고 허탈했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의 삶이 나아졌는지를 본다면 물론 나아진 부분은 있지만, 불평등이라든지 복지 문제를 봤을 때는 30년 전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다.” 30년 전에 느꼈던 불평등보다 부모가 돼 자식의 미래를 우려하며 느끼는 불평등은 더 마음이 아프다. “나도 흙수저였는데, 나는 내 자식에게 더 많은 흙이 묻은 수저를 물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너링을 잘해 운전병이 됐다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아들과 엄마 최순실의 힘으로 이대에 입학했다는 정유라의 이야기 앞에서 김씨는 과연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조심스럽다. 30년 전 광장에서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정의를 외쳤지만, 이제는 쉽게 자신이 서지 않는다. “아들이 얼마 전 공병으로 힘든 일을 하다가 제대했다. 공병이 너무 힘들어 3개월은 지뢰제거반을 자원할 정도였다. 아들은 군대에서 무거운 걸 너무 많이 들어 무릎이 안 좋다. 아들에게 전처럼 자신있게 ‘페어플레이’를 하며 살라는 말을 못하겠다. 30년 전 나는 불의를 봤을 때 행동으로 나섰다. 어쩌면 지금은 그때하고는 정반대의 사고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활인이 되면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이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생활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87년 경험은 한국 사회 민주화 지류의 바탕
1987년 광장에 섰던 이들은 민주화된 한국 사회에서의 삶이 이렇게 버거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성원씨(53·여)는 2008년 이민을 결정했다.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였다. “학교 때는 학내방송국 기자로 시위 현장을 취재하러 다니면서 언젠가는 학생들의 외침이 결실을 맺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었다. 1987년 만족스럽지 않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래도 민주주의가 꽃필 가능성이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졸업 후에는 회사생활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을 했고 그렇게 성실하게만 살면 내 삶도 물 흐르듯이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 힘을 기울여 일을 하던 정씨가 멈춰선 것은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20년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회사에 충성하며 일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내 분야에서 탄탄한 경력도 쌓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몸은 축나고 아이디어는 고갈됐다.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런데 20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면 한국에서 나는 그냥 백지상태가 되더라. 친구들이 하는 말이 마흔 넘으면 마트에 취업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어느 시점에는 직업에서 손을 놓을 텐데, 그 이후에 지속가능한 삶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정씨는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했다. “나이 들어서도 일을 할 수 있고, 직업에 차별도 없고, ‘갑을병정’의 권력관계도 적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30년 전 민주화를 성취했지만, 이후 30년은 어쩌면 민주주의의 후퇴였다. 윤민석씨(가명·50)는 “어쩌면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가치는 뼈다귀만 남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 말해주는 시대정신이 민주주의의 좌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명박 후보의 경쟁력은 자신이 부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모두 달려들어야 할 가치가 됐다. 이미 대통령이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우리 세대도 이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제시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대기업의 간부가 될 나이였고, 정치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현실에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1987년 이후 30년의 시간을 돌아 2017년에 선 지금, 다시 열린 광장은 지난 30년간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윤씨는 “어쩌면 지금 우리 세대가 광장에 나가는 게 주중에는 죄를 짓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죄 사함을 구하는 모습이 아닌가도 싶다. 그동안 일반 소시민으로 살아오면서 하지 못했던 책임을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가는 것으로 대신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탄핵, 특검 등 지금 신문에 나오는 문구를 넘어서 30년간 축적돼온 문제들을 돌아봐야 한다. 혹자는 우리 세대가 사교육과 부동산 투기의 주범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각 세대는 그들이 살아온 시대적 흐름이 있고 그 시기에 져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세대에 대한 변명은 아니지만 30년 전 우리는 역사적 부름에 정확하게 응답했으나 이후 30년 긴 시절을 타협했고, 그 타협들이 역사적 후퇴를 낳았다. 이제 또다시 던져진 과제 앞에서 다시 응답할 시점이라고 본다.”
다시 열린 지금의 광장은 지난 30년간 때로는 타협하느라 때로는 버거워서 내려놓았던 민주주의 가치를 다시 모색해보는 새로운 희망이다. 서재영씨는 지난 20년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에 대한 비용을 혹독히 치른 만큼 2017년의 광장은 각자도생하며 살아오느라 놓친 어떤 가치들을 되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인적으로 1997년 김대중 당선 이후에는 이제 민주정권이 들어섰으니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생활전선에만 충실하게 살았다. 1987년 이후 키워온 건강한 정치의식을 놓아버린 셈이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것은 누가 잡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들어선 보수정권은 지난 10년간 온갖 권력을 장악했다. 지난 20년은 누가 정권을 잡든 국민이 주인 역할을 놓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지난 20년 한국 사회는 각자도생을 기치로 이기적인 사회로 치달았다. 쉽진 않겠지만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면 새로 열린 광장이 이 흐름을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광장을 경험한 청년세대를 희망으로 봤다. 때때로 치열한 경쟁이 ‘각자도생’의 삶으로 이들을 몰아넣더라도 이번 광장에서 경험한 ‘공유’의 가치는 SNS를 기반으로 이들의 삶 속에서 내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청년세대를 보면 미안하다. 이들은 지독한 경쟁 속에서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덜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청년세대들은 미디어 혁명을 통해 사회의 주체로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고 본다. 치열한 경쟁이 때론 개인을 소시민적인 삶에 매몰시켜도 SNS는 이들이 언제든 정보를 공유하고 새롭게 각성할 수 있는 열린 창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본다”
차준원 이사는 이번에 열린 광장이 1987년의 씁쓸함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무엇보다 광장에 나온 청소년들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자신이 1987년에 느꼈던 열패감을 지금의 청소년들이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다. 차씨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날에는 오후 2~3시쯤 있는 청소년들의 사전집회 자리를 찾는다. “광장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누군가가 이를 들어주고, 또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매개가 되어 제도까지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광장의 청소년 열기는 굉장하다. 뜨거웠던 광장의 열기가 과연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바꿨냐고 물었을 때 이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다면 청소년들은 상처받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는 이를 경청하고 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교육감들이 만민공동회처럼 진행되는 청소년들의 집회에 찾아와 교육현장에서 이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실험은 광장이 끝나도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청소년들은 또 다른 새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다.”
불평등 문제는 여전히 삶을 괴롭히는 문제
30년이 지나 다시 열린 광장에서 시민들은 묻는다. ‘이게 나라냐’ ‘이렇게 살아도 되냐’. 정선애 센터장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면서 30년이 저물고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질문은 30년 전의 광장과 지금의 광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30년 전에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단 하나의 구호에 묻혀 나오지 않았던 질문이기 때문이다. 정 센터장은 “1987년에서 내 삶의 민주주의는 사실 ‘빈칸’이었다. 민주화가 된다는 것은 좋은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민주화가 되면 정권에 반대해서 감옥에 가는 사람이 적어질 것이고, 재벌들이 전횡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의 기대만 있었다. 이러한 공백지대가 지난 30년의 민주주의 결핍,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낳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국가란 무엇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를 집단적으로 묻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라는 사회 전체의 회고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다음 30년을 준비하는 중요한 자양분이다. “30년 전 이론적으로 민주화를 생각했지만 그와 내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생각을 못했다. 지금 광장에 나온 청년세대는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주목해서 보고 내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정치적 구호는 헛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87년 민주항쟁 30년을 지나 이후의 30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하고 실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