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골수도(孟骨水道)는 진도에서 두 번째로 물살이 세기 때문에 현지 어부들도 그 바닷길로는 여간해선 어선을 몰지 않는 곳이에요. 그런데 왜 세월호가 그리 갔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고향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 이건 꼭 소설로 써두어야겠어요. ”
글 쓰는 사람으로 산 지 25년이 되었다. 동화, 시, 소설, 산문집, 교양서, 번역서, 평론집, 희곡집을 합치면 70권에 이르고, 이때까지 200만부가 넘게 나갔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봄바람>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에 하나로 꼽힌다. 사람보다 개가 더 유명한 진도가 고향이고, 심지어 개띠 해에 태어났다. 개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고, 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쓴다. 진도가 고향이 아니었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반세기를 오롯이 글 쓰는 일에 바친 박상률 작가를 만났다.
진도 소년 박상률
옛 이름이 옥주(沃州)일 정도로 땅이 비옥한 곳 진도. 여름 석 달 농사지어 제주 3년을 책임진다는 옛 말도 있다. 씻김굿, 강강술래, 진도아리랑 등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민속이 있는 곳. 남종화의 산실인 운림산방이 있는 곳 진도는 섬 자체가 문화재다. 땅이 비옥하다 보니 조선시대에 유배자가 삼수갑산보다 더 많았다는 그곳은 작가 박상률의 고향이자, 문학의 근원지다.
“저는 개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늘 다짐하면서 자랐어요. 진돗개는 제 친구였거든요. 진돗개는 쥐나 노루 정도는 쉽게 잡고 집도 잘 지키고 심부름도 하고 노래 곡조도 따라 하지요. 개와 함께 들로 산으로 쏘다니고, 개에게 심술부리고, 심부름도 시키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커서 보니 어린 시절에 개랑 친구하면서 지낸 이가 많지 않더군요. 하여튼 개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늘 목표였고, 지금은 이른바 ‘개장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지금 개 팔아서 살고 있고, 나아가 고향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진도가 고향이 아니었다면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상률아, 하고 싶은 일에 일생을 바쳐라”
아버지도 평생을 진도에서 살았다. 진도에서 교직생활을 하셨고, 퇴직 후에는 진도의 향토사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박병술 선생의 장남인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맏아들이다. 박상률 작가의 저서를 꼼꼼히 읽다 보면 그가 역사와 풍속, 그리고 한학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병술 선생의 저서 <진도의 시가문학>을 찾아 읽으면서 작가가 가진 문학적 에너지의 근원은 진도와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유배자가 많던 지역이라 옛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어려서부터 한적(한문으로 쓴 책)을 많이 접했어요. 할아버지한테 한문 책 읽는 방법 같은 걸 익혔습니다. 할아버지는 신문도 시조창 하듯이 읽으신 분이라 그런 걸 통해서 자연히 글의 운율 같은 것도 익혔고요. 아버지는 평생 교직에 계셨지요. 옛날 시골학교엔 월부 책장사가 많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월부로 들여놓으신 여러 가지 책을 제가 다 읽은 것 같아요. 그때는 책 말고 가지고 놀 게 없었어요. 교직에서 물러나신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진도의 역사와 풍속에 대해서 연구하고 글을 쓰셨어요. 시집도 내셨지요. 열 권 정도의 책을 남기셨어요. 제가 하는 일을 무조건 지지해주시고, 하고 싶은 일에 일생을 바치라고 응원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상과대학에 가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 월급으론 6남매를 학교에 보내는 게 힘겨워 보였다. ‘장남인 내가 빨리 거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가장 가까운 국립대학교 상과대학에 원서를 냈다.
“그때는 국립사범대를 나오면 무조건 임용이 되는 시절이었지만 사범대를 가지 않고 상과대를 간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어요. 빨리 취직해 동생들 뒤를 대보려고 그랬지요. 1970년대엔 종합상사니 은행이니 하는 게 인기 직장이었거든요. 우리 또래는 상과대학을 다녔든 문리대를 다녔든 어차피 학교가 늘 휴교여서 전공은 별 의미가 없었어요.”
이후에 회사원, 입시학원 영어강사, 잡지 편집주간, 문예창작학과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에야 어릴 적 꿈인 ‘전업 작가’로 안착할 수 있었다.
대학교수 박상률, 희곡 수강생 전원을 등단시키다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던 때에는 희곡 창작 과목을 전문으로 맡았는데 30여명을 모아서 ‘희곡세미나 반’을 열었다. ‘전원 등단할 때까지 수업한다’고 공언하고 세미나를 운영했다. 마지막 한 학생이 등단하자 반을 해체했다. 5년이 걸렸다. 숭의여대 졸업생들은 ‘신화’ 같은 일로 기억하고 있다. 대학에 있을 때 만난 제자 중에는 작가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있다. 지금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분이기도 하다. 소설가 성석제 선생의 모친이 바로 그분이다. 이제 더 이상 대학 강의를 하지 않지만, 청소년과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계속하고 있다.
1년에 200회 이상 독자를 만나다
그는 청소년 대상 문학 강의를 가장 많이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청소년 소설의 대표작이자 교과서 소설 중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인 <봄바람>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에는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읽은 학생들이 플래시몹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산 지 벌써 사반세기가 되었군요. 그간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여간 올해로 글을 쓰고 산 지 햇수로는 25년째가 되었어요. 제가 쓴 책을 독자가 얼마나 읽어주었는지는 정확히 잘 모릅니다. 200만부가 넘었다는 건 최근에 들었어요. 어떤 작가는 책 한 권이 200만부 팔리기도 하는데, 그런 것 보면 제 책은 많이 팔린 것도 아니지요. 작년 강원도 어느 도시에서 강연 끝나고 학생들이 제 책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시집’을 들고 어떤 몸짓을 하더군요. 그런 걸 ‘플래시몹’이라고 한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글을 쓰고 살자니 독자들이 부르는데 안 갈 수가 있나요.”
장르를 초월한 글쓰기- 이야기는 다 통한다
외국에는 문학의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가 많지만 한국의 문학 풍토는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더 전문성 있는 작가처럼 대우받는다. 1990년에 시와 희곡으로 등단한 이후 동화, 동시, 시, 소설, 희곡, 평론, 창극을 넘나들며 경계를 허무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가열차게 해 왔다. 어린이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동시 같은 동화, 시처럼 짧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대사가 많은 소설, 소설 같은 이야기가 있는 시, 이야기 시를 극으로 형상화한 희곡, 춤과 소리로 한의 서사를 풀어내는 창극….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독자층도 넓다.
“처음부터 장르를 넘어서는 글쓰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있는 제 시를 본 어떤 편집자가 ‘그것 동화로 써보시오, 또 어떤 시나 동화를 소설로 써주시오’ 했지요. 그러면 저는 ‘야 그것 재미있겠다’ 이러면서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사실 이야기는 다 통합니다. 다만 내게 온 이야기를 어느 장르에 배치할 것인지 ‘교통정리’만 하면 돼요. 다 똑같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지만 접시에 담을 음식 다르고, 대접에 담을 음식 다르지요. 음식을 마땅한 그릇에 담는 일과 이야기를 어느 장르 글로 할 것인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우물을 파 내려가도 깊어질 수 있지만 한계도 있지요. 깊게 파려면 넓게 파는 것도 중요해요. 저는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파는 거라 생각합니다.”
순우리말로 삼국지를 옮긴 최초의 작가
얼마 전, 논문을 쓰면서 원문에 나오는 시나 노래를 우리말로 번역한 삼국지를 찾다가 주옥 같은 책을 발견하고 보니 ‘박상률 번역’이었다. 한자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뒤 토씨만 우리말로 달아놓은 번역서가 대부분인데, 순수 우리말로 옮긴 삼국지를 읽은 건 처음이었다. 원문에 나오는 시와 노래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었다. 10년간, 30만권이 독자들의 손으로 갔다.
“예전부터 글 아는 사람은 일단 ‘문사철’에 두루 통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 문학,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시대 작가들은 삼국지의 이야기성에만 치우쳐 재미 위주로 옮겨 놓더군요. 기왕 읽을 삼국지라면 시든 노래든 빠트린 것 하나도 없는 완역 삼국지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것도 청소년들도 알아먹을 수 있는 수준의 어휘를 쓴…. 그래서 청소년문학을 하는 제가 감히 나섰지요. 시 한 줄 번역하는 데 중국의 역사와 전거가 되는 문학 책 같은 것을 뒤지다 보니 시 한 줄 때문에 일주일이 걸리기도 해서 정말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삼국지 배경 지역 돌아보고, 자료 읽고 하는 데 2년 정도 걸렸고, 서재에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틀어박혀 옥편을 뒤지면서 한 줄 한 줄 우리말로 옮긴 시간이 3년 정도 걸렸어요.”
진도 맹골수도- 바다 지형을 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는 항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박상률 작가를 만나고 싶었다. 진도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맹골수도를, 팽목항을 접하고 싶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장어탕을 먹으러 자주 가는 곳 팽목항의 이야기를 어느 글에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세월호 사고 이후, 오래 침묵했던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진도 얘기를 꺼냈다.
“울돌목이라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육지와 갈라져 있습니다. 최근 인기를 끄는 영화 ‘명량’이 울돌목의 한자식 표현이지요. 좁은 해협으로 바닷물이 빠져 나가려니 물살이 굉장히 센 곳이에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던 이유도 그런 지형 특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맹골수도(孟骨水道)는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의 바닷길로 진도에서 두 번째로 물살이 세기 때문에 현지 어부들도 그 바닷길로는 여간해선 어선을 몰지 않는 곳이에요. 어려서부터 들은 바로는 거기로는 배가 안 들어간답니다. 그런데 왜 세월호가 그리 갔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세월호를 왜 하필 거기에 가라앉혔을까? 바다 지형을 알고선 절대 그럴 수 없어요.”
1980년 5월의 전남 도청, 그리고 2014년 6월 진도 이야기
몇 년 전 받은 그의 명함에는 ‘쓴다, 또 쓴다’라는 문구가 굵고 강한 필체로 박혀 있었다. 장거리 지방 강의가 없는 날에는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용인시 고기리에 있는 작업실에 출근하여 글을 쓰고, 목표한 글을 완성해야만 퇴근한다. 80년 5월, 그는 전남 도청에서 끝까지 싸웠던 시민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이제는 글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눈 밑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작가는 오로지 쓰는 사람입니다. 쓰기 위해 읽고, 쓰기 위해 사는 존재이지요. 내가 살고 간 시대의 모든 것을 다 쓸 수는 없겠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써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고향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 이건 꼭 소설로 써두어야겠어요. 단편소설로는 이미 두 편을 썼지만 구체적인 이야기가 담긴 장편소설을 써야지요. 소설가 임철우 선배가 광주 5·18을 쓴 게 ‘봄날’입니다. 그런 식의 소설이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작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안 하면 오히려 병이 납니다. 광주의 이야기는… 글쎄요. 아직은 못 쓰겠어요.”
내년 5월에 다시 만나게 되면, 80년 전남도청 안에 있던 청년 박상률의 이야기를 꺼내 보도록 노력하겠다고 작가는 약속했다. 꼭 내년이 아니어도 된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때가 되면, 소설로 쓸 사람이기에 묵묵히 기다리면 반드시 듣게 될 이야기이므로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해질녘에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마을로 한참을 걸어내려 왔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멀리, 산 속 등불처럼 그가 서 있었다.
<글·사진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