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나라에서 살았거나 조기유학을 한 학생들이 많다보니 영어 교사들이 수업시간 중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은 김영철이 펴낸 <영어 조선을 깨우다 1·2>를 읽고 알게 됐다. 1920년 5월에 보성교에선 학생들이 일본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 출신 일본인 영어 교사의 발음이 일본식이라면서 영어 발음이 좋은 조선 교사로 교체해 달라고 동맹휴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제시대에도 영어 가정교사가 성행해서 영어 교습을 중개하는 신문광고가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영어 붐의 뿌리는 매우 깊은 것이다.
이승만, 조병옥, 장덕수, 장면, 윤보선 등 해방 후 1960년대까지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미국과 영국에 유학해서 영어에 능통했다는 사실이다. 영어권 국가에 유학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출세’를 하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신문지상에서는 아무개가 미국 어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는 단문 기사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영어권 대학에 유학한 박사가 너무 많아서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운 지금 상황에서 보면 꿈 같은 이야기다.
저자는 대한제국에서 영어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경위와 최초로 영어를 배운 조선인들의 이야기로 조선이 어떻게 영어에 빠져들어가게 됐는지를 풀어나간다. 하멜 일행은 조선을 접한 최초의 서양인들이었지만 이 중 영어권 사람은 없었다. 영어 사용자가 조선과 접촉하게 된 것은 18세기 말에 조선 부근을 항해하다가 상륙한 브로톤 함장 일행이었다고 한다. 19세기부터 서양인들이 조선을 방문하는 경우가 늘었는데, 중국인 역관을 통한 이중통역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1877년에는 선교사들이 영어로 된 조선어 입문서를 펴내는 등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이 커졌고, 개화를 추진했던 고종황제도 조선인이 서양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1881년 말 고종은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고, 젊은 학도 38명을 이끌고 중국 톈진을 방문해서 신학문을 배워오도록 했다. 김윤식은 그 중 몇 명으로 하여금 영어를 배우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중국어 역관 출신인 고영철(高永喆)만이 영어에 재주가 있다고 추대되었다고 한다. 고영철이 1883년에 보빙사(報聘使) 수원(隨員)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 것도 그가 당시에 영어를 해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 영어학습자는 윤치호가 아니라 고영철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1883년부터는 개화파를 중심으로 영어 학습이 붐을 이루었고, 영어를 가르치는 동문학이 설치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의 영어교육은 실용회화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영어를 배운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 일행 중 몇몇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고종은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단을 세워서 인재 양성에 나섰으나 국운은 이미 기울었다. 오히려 영어를 배운 자들이 매국에 앞장섰으니 이완용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런가 하면 경제적 대책도 없이 용감하게 미국 유학에 나선 이들이 많아 조정(朝廷)에는 유학생들이 아사할 지경에 처했다는 상소가 올라오곤 했다.
버지니아 주의 로어노크 대학에선 의친왕 이강과 김규식이 같이 공부했으니, 그것만 보더라도 미국 유학이 갖는 의미가 특별했음을 알 수 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최초로 자결한 이한응이 육영공단에서 공부한 외교관이었기에 영어 학습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외세에 부화뇌동했던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1990년대 들어 불어닥친 영어열풍과 조기유학의 뿌리가 의외로 깊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이미 영어에 능숙한 젊은이들이 급속히 늘어가고 있어서 경쟁의 도구로서 영어가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고 본다. 영어가 신분을 상징하고 성공을 보장하던 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리는 셈이다. 끝으로 사사(私事)에 이르나, 이 책에 의해 확인된 조선 최초의 영어학습자 고영철은 필자의 외증조부(필자의 외조부 고희동의 부친)이다.
이상돈<중앙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