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선라이즈 선셋> 국내 개봉으로 본 종교 지도자의 일상
오전 3시. 나이 70 중반인 노쇠한 달라이 라마가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다.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양치질을 한다. 국내 개봉한 러시아 감독 비탈리 만스키의 다큐멘터리 <선라이즈 선셋>에서 만난 달라이 라마의 모습이다. 감독은 ‘인간 달라이 라마’의 하루 일상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과장되거나 신비의 옷을 벗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감독의 바람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장면 하나로 강렬하게 전달된 셈이다.
알려진 일정만을 보더라도 달라이 라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공식 웹사이트(dalailama. com)에는 내년까지 일정이 빽빽이 기록돼 있다. 일 년 가운데 많은 날은 세계 곳곳에서 강연하고, 법회와 종교행사를 진행한다. 공식 일정이 없는 날에는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고 언론과 인터뷰한다. 나이를 잊은 초인적인 일정이다.
독서와 TV뉴스 시청, 하루 두 끼 식사
다큐멘터리 초반에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에 대해 말한다. “모든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쪼개면 쪼갤수록 무수히 나누어지고 더하면 더할수록 우주적인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라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짧은 시간이 되기도 하고 긴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그는 누구보다 긴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북인도 히말라야 산맥 인근의 망명지 다람살라에서 지내는 그의 일상은 50년 동안 거의 동일하다. 오전 3시에 기상해 공식 일정을 소화하고, 쉬는 시간 대부분은 개인적인 기도와 독서로 보낸다. 하루 평균 독서시간은 4시간. 티베트 불교경전을 주로 읽고, 과학과 심리학 등의 책도 읽는다. 짬짬이 거실에서 고물 위성텔레비전을 통해 외신뉴스를 보고 자연 다큐멘터리도 즐겨 본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린다. 낡은 속옷과 오래 신은 슬리퍼. 고물 텔레비전과 손때 묻은 책들, 책상 위에는 약병이 여러 개 놓여 있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본다. 남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루 두 끼 식사와 저녁에 버터차 한 잔. 별일 없으면 일찍 잠자리에 든다.
법회와 강연은 요청자가 있으면 일정이 비어 있는 한 수락한다. 해외 초청도 마찬가지다. 법회와 강연을 제외한 공식 일정은 주로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언론과 인터뷰하는 일이다. 다람살라를 여행하는 사람은 운이 좋으면 그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한두 사람에서 100여 명까지 짧은 이야기와 개인적인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다람살라는 늘 붐비고 있다. 늘어선 접견객을 보며 만스키 감독은 첫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약해 보이는 한 명의 수행자를 만나려고 몰려드는가?” 찾아오는 사람은 유명 정치인부터 영화배우, 늙고 병든 이까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천차만별이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어 공식통역자 박은정씨가 오랫동안 지켜본 접견실의 풍경은 다음과 같다. “처음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종종 거만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접견 직후의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정말 순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변해서 나옵니다.” 짧은 순간 동안 마법이라도 벌어지는 것일까. 박씨가 꼽은 이유는 만나는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와 ‘솔직함’이다.
“배려 깊고 솔직, 접견 후 누구나 행복해져”
달라이 라마와 함께 <용서>라는 책을 쓴 홍콩 출신의 작가 빅터 챈은 성직자에게는 곤란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당신도 성욕이 생깁니까?” 달라이 라마는 웃으며 답했다. “물론 내게도 성욕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빅터 챈이 다시 물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그의 대답은 명료하다. “그럴 때면 나는 소리칩니다. ‘나는 달라이 라마다! 나는 달라이 라마다! 나는 달라이 라마다!’ 그러면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맙니다.” 솔직함은 용기에서 나온다. 진실 앞에서 감출 것이 없다는 당당함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살아가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숙소가 있는 다람살라 남걀 사원 입구는 고국 티베트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늘 붐비고 복잡해진다. 요즘은 지난달 티베트 캄 지방인 중국 칭하이성 위슈현 대지진 참사의 복구를 위해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벽보가 가득하다. 티베트인 10만명이 사는 도시에 닥친 대지진으로 약 2만명이 사망하고 거의 대부분의 가옥이 무너져 삽시간에 지옥이 되자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에 즉각 자신의 귀국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변은 당연히 거절. 망명지의 티베트인들은 푼푼이 성금을 모아 인편을 통해 보내고 세계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현지의 티베트인들은 중국 정부가 지진 피해를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고 피해 복구에는 미온적이라는 항의를 계속하고 있다.
망명자로서 달라이 라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고작이다. 게다가 티베트인들에게 중국 정부를 미워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달라이 라마의 변하지 않는 일상 중 하나는 중국인을 위한 기도다. 망명생활 5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이를 스승으로 삼을 것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나도 어릴 때 화 잘내고 성질 급했던 사람”
지난 5월 5일 다람살라의 티베트 학교(TCV)에서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망명지의 청소년을 위해 달라이 라마가 아일랜드 출신의 리처드 무어를 초청해 소개했다. 앞에서 말한 책 <용서>의 주인공이다. 무어는 영국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총탄으로 10살의 어린 나이에 맹인이 됐다. 1972년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눈을 앗아간 경찰을 용서했다. 스스로의 삶을 분노로부터 해방시켰다. 달라이 라마가 눈먼 그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 느끼게 했다. 그를 친구일 뿐 아니라 삶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으로 소개했다. 망명지의 티베트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중요한 인생을 중국 정부나 적을 향한 분노와 절망으로 채우지 말라는 완곡한 가르침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준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법회 때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종교적 가르침과 노력이 당신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주었습니까?” 대부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할 때 달라이 라마는 특유의 웃음과 함께 자신의 내적 변화를 이야기한다. “나는 어릴 때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정말 인간이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눈에 띌 만큼 고귀한 사람이 됐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주 조금씩 선하고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어려운 일을 닥칠 때 예전보다 선한 방식으로 마음을 쓰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착한 삶을 살겠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나보다 더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선라이즈 선셋>의 만스키 감독은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이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그는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을 얻게 됐다고 고백한다. 달라이 라마가 늘 이야기하는 가장 진부하며 진실한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김천<종교전문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