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인가

김호기<연세대 교수, 사회학>
2010.01.19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시다’들의 고난한 삶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의 산업화

Weekly 경향은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라는 주제로 2010년 연중기획을 진행한다.
기획의 제1부는 전태일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그늘과 노동의 미래를 주제로 다룬다. 민족과 평화, 민주주의, 노동의 미래를 역사적 현장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담아 내는 이 기획은 김호기 연세대 교수와 박태균 서울대 교수, 그리고 Weekly 경향 특별취재팀의 취재로 진행된다. 지난 호 박태균 교수에 이어 김호기 교수가 서울 청계천 전태일 분신 현장 인근에 세워진 전태일거리와 전태일 동상을 방문해 느낀 소감을 싣는다. <편집자주>

정치인을 포함해 제법 알려진 작가, 교수, 언론인의 동판부터 시작해 평범한 시민들이 남긴 동판은 이들이 꿈꿔 온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김석구 기자>

정치인을 포함해 제법 알려진 작가, 교수, 언론인의 동판부터 시작해 평범한 시민들이 남긴 동판은 이들이 꿈꿔 온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김석구 기자>

2009년이 저물어가는 세밑에 청계천을 찾았다. 전태일 동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 한국방송(KBS)에서 <한국 지성사>의 진행을 맡았을 때도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은회색 반신의 동상 앞에 서면 자연 여러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 생각나고, 1970년대 청계천 풍경이 상상되고,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시대의 의미를 묻게 된다.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의 다른 이름
동상 주변 바닥에 펼쳐 있는 동판들을 보니 이번에는 다시 민주화 시대가 떠오른다. 정치인을 포함해 제법 알려진 작가, 교수, 언론인의 동판부터 시작해 평범한 시민들이 남긴 동판은 이들이 꿈꿔 온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하나하나 동판을 읽어 가다 보면 새삼 마음이 서늘해지고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의 다른 이름이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누구나 매일매일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노동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전태일이 살던 시절의 노동은 인간해방은 고사하고 비인간적 삶 그 자체였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 초반, 박노해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드르륵 득득 /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 시다의 언 손으로 / 장미빛 꿈을 잘라 /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 끝도 없이 올린다.”(‘시다의 꿈’)

짧지만 고단했던 전태일의 삶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시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은 우리나라 산업화가 궤도에 올랐던 때다. 1960년대 중반에 수출 지향 산업화를 본격화하면서 박정희 체제가 고도성장을 이제 막 구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수출 지향 산업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 조건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제조업 부문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1960년 2330원에서 1971년 1만8389원으로 올랐지만 1960년대의 임금 수준은 생계비의 22.7~53.5%에 머물렀다. 제조업 부문 노동자의 주당 노동시간도 1963년 50.3시간에서 1969년 56.3시간으로 크게 증가했다.

어느 나라건 초기 산업화는 프랑스 정치경제학자 알랭 리피에츠가 강조하듯이 ‘유혈적’ 특징을 보여 주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자계급 상태는 19세기 서유럽 자본주의의 초기처럼 더없이 참혹했다. 전태일이 죽음으로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처절하면서도 당당한 요구였다.

객관적 지표만이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박노해 시를 하나 더 인용하면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 … /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 나는 ET가 되어 /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 연장노동 도장을 찍”(‘손무덤’)어야 하는 게 바로 노동자의 삶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경제적 생활 조건은 그 기본 중 기본이며,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기본이다.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수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산업화의 진정한 주인공, 노동자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왼쪽)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가 서울 청계천 6가 버들다리에 세워져 있는 전태일 동상을 방문해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김석구 기자>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왼쪽)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가 서울 청계천 6가 버들다리에 세워져 있는 전태일 동상을 방문해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김석구 기자>

그가 죽은 지 40년이 흘렀다. 선한 눈빛으로 낮은 곳을 응시하는 전태일 동상 앞에 서서 내가 떠올린 것은 두 가지다. 먼저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이해 한 순환에 도달한 우리 역사에서 과연 누가 이 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의 문제다.

역사를 읽는 시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 주류 중심적 역사관과 반주류 중심적 역사관이 손꼽힌다. 엘리트 중심의 역사관이라고 불러도 좋고 민중 중심의 역사관이라 불러도 좋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주류 중심적 역사관이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이승만 시대’나 ‘박정희 시대’라는 개념이 함축하듯이 한 개인으로 상징되는 특정한 엘리트 집단이 지난 역사를 주도해 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역사에 대한 매우 협소하면서도 피상적인 시각이다. 지난 현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겨냥해 온 두 가지 목표는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였으며, 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주도해 온 이들은 다름 아닌 이 땅의 평범한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경제적 생산의 확대와 심화를 뜻한다면 이 산업화를 담당한 주체는 생산 현장의 노동자와 농민이었으며, 최저생계비조차 되지 않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수해야 했던 이들이야말로 고도 경제 성장의 진정한 주류이자 주인공이었다.

더욱이 주류 중심적 역사관에서 옹호하는 우리 사회의 여건상 ‘불가피’했다던 개발독재론도 사실 정치권을 상위 파트너, 재벌을 하위 파트너로 한 엘리트 연합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바로 이런 정경유착은 지난 1997년 외환 위기를 낳은 주요인이 되고, 우리 경제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훼손한 그늘을 이뤄 왔다.

불투명한 노동의 미래
동상 앞에서 생각한 또 하나의 문제는 노동의 미래다. 전태일이 분신한지 40년이 지난 현재 노동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만큼 노동 문제에도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해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실업 문제는 그 중핵을 이룬다.

지난해 여름 경향신문이 보도했듯이 현재 우리 사회 전체는 이른바 ‘비정규직 바다’를 이루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비정규직 규모는 850만명이 넘는다. 평균 가구원수(2.87명)를 고려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이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이며, 정규직(741만명)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비정규직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대체로 30%인데 반해 우리나라처럼 50%를 넘어서는 국가는 매우 드물다.

[2010 연중기획]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인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수출 지향 산업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 조건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기 때문이었다. 위 _ 1977년 강원도 장성에서 인차를 타고 갱 안으로 들어가는 광부들. 아래 _ 1970년대 한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봉제 일을 하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수출 지향 산업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 조건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기 때문이었다. 위 _ 1977년 강원도 장성에서 인차를 타고 갱 안으로 들어가는 광부들. 아래 _ 1970년대 한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봉제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임에도 임금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점이다. 지난해 비정규직 임금은 월평균 120만2000원이었다. 이는 2008년보다 오히려 7.3% 감소한 것이다. 과연 전태일 시대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발전해 온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선진화의 현주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점증하는 세계화 시대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미래는 우울하기 이를 데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국가적 이슈라는 점에서 노사관계를 넘어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대안을 모색해야 함에도 그 어떤 주체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슈화하지 않고 있다. 세계화가 강제하는 불가피한 결과로만 인식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청년실업은 노동이 처한 또 하나의 우울한 미래다. 졸업을 했는데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면 선생으로서 안쓰러움을 넘어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전국의 실업률이 3.3%를 기록한 가운데 청년층(20∼29세)의 실업률은 7.4%로 전체 실업률의 두 배를 넘었다.

한편 고용률 측면에서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 청년층(41.3%)은 미국(51.2%), 멕시코(48.6%), 일본(41.4%)보다 낮다. 실제 청년 실업률보다 실업에 대한 체감이 훨씬 높은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지표다.

문제는 대안이다. 노무현 정부의 청년 고용 지원 정책인 예스(YES: Youth Employment Service) 프로그램이나 이명박 정부의 행정인턴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동안 정부가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의 효과는 썩 신통치 않아 보인다. 생각한 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늘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임시직 고용으로는 젊은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비정규직 문제든 청년 실업 문제든 국가적 수준에서의 획기적인 정책이 시급히 모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고용 창출이 어려운 시대인 만큼 정부, 정당, 기업,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 주요 사회 조직들이 일자리 만들기를 위한 역사적 대타협을 추진해야 할 시점에 이미 우리 사회는 도달해 있다고 봐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하여
1970년대 중반에 나는 청계천 5가와 6가 사이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장충체육관 옆에 있는 장충고를 다녔다. 16~18살 때였다. 평화시장 옷가게를 구경하기도 하고 헌 책방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청계고가를 바라보며 노점에서 떡볶이나 어묵을 사먹기도 했다. 이곳은 내 기억 속에 선명히 살아 있는 1970년대 서울의 풍경 가운데 하나다.

전태일 동상이 있는 다리 아래에는 고가를 철거하고 인공 하천으로 다시 이어진 청계천이 흐른다. 전태일이 죽은 지 어느새 40년이 흘렀지만 과연 노동자의 삶은 얼마나 나아진 것일까.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박노해, ‘노동의 새벽’)다는 탄식은 1970년의 전태일, 1980년대의 박노해, 2010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변화하지 않은 삶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주위를 좀 더 둘러보겠다는 박태균 교수를 남겨두고 종로 5가 쪽으로 걸어갔다. 세밑의 동대문 시장은 제법 북적였다. 손님 부르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선 벌써 낮술에 취한 사람들의 악다구니도 들렸다. 이곳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노동해방은 무엇이고, 인간해방은 무엇인가. 바로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다소 지친, 그러나 살가운 시장 사람들의 표정 속에 나의 2010년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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