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판 ‘용병’ 들이 접수하다

2005.11.15

외국인 선수 비율 크게 늘어… 아랍권·남미서 중요한 스포츠로 자리매김

그루지야 국적의 스모 지망생 레반 고르가제(18)는 일본어도 영어도 할 줄 모른다. 일본에 온 지는 겨우 한 달 됐다. 그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일본인 스모 선수들 사이에 끼어 숨죽인 채 밥을 먹으며 일본인 특유의 감정 절제법과 예절 등을 몸에 익히고 있다.

키 198㎝에, 몸무게 126㎏인 그는 체중을 20㎏ 정도 더 불리는 것이 목표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나마 낙이 있다면 매일밤 휴대전화로 고향의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수다를 떠는 정도.

어린 나이의 고르가제가 혼자서 힘든 타향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자신도 언젠가는 일본을 호령하는 스모 선수가 되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발틱해 연안의 에스토니아에서 일본에 온 지 19개월 된 ‘바루토’(20)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바루토는 일본인들이 ‘발틱(Baltic)’ 발음을 일본식대로 부르며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조만간 일본 프로스모의 최상위 리그인 마쿠우치(幕內)에 진출하는 최초의 금발 선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죠. 아직도 스모의 많은 관습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나 개의치 않습니다. 어쨌든 최고가 될 테니까요.”

요코즈나마저 이방인이 차지

일본 스모의 국제화를 다루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11월 3일자에서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기로 소문난 일본 스모계에 벽안(碧眼)과 금발(金髮)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일본 스모계는 완전히 시장개방된 이후 체격조건이 유리한 외국인이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스모 선수의 국적에 대한 규제가 완화된 것을 계기로 일본 프로스모계에 외국인 비율이 1995년 2.5%에서 2005년에는 8%까지 늘었다. 특히 상위권으로 갈수록 외국인들의 비율이 높다. 최상위 선수들의 리그인 ‘마쿠우치’에는 28%가 외국인이다. 프로스모의 챔피언도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다. ‘요코즈나(橫綱·천하장사)’ 자리는 2003년 몽고 출신인 아샤쇼루(朝靑龍)에게 넘어간 이후 일본인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아마추어 스모선수들을 배출한 나라도 40개국에서 84개국으로 늘었을 정도로 스모는 국제 스포츠화에 성공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그동안 스모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결과다.

스모의 국제화는 40여 년 전 몽고와 태평양의 섬나라들에서 시작됐다. 이들 나라에는 모두 스모와 비슷한 형태의 전통 ‘씨름’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5년 전 불가리아, 헝가리, 그루지야 같은 동유럽 또는 구소련 국가들이 스모판에 뛰어들면서 스모는 본격적으로 국제화의 길을 걸었다. 곰처럼 뚱뚱한 모습의 자국 스모선수들만 봐온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키에 근육질의 몸을 갖춘 서양 스모선수들은 성(性)적으로도 매력 있게 다가왔다.

불가리아 출신의 칼로얀 마하랴노프(22)는 일본 스모계 내의 대표적인 ‘섹시’ 스타다. 그의 연습장면을 담은 포스터는 여성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조국 불가리아 내에서도 그는 국위를 선양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사실 한국의 전통씨름과 마찬가지로 내국인만으로 이뤄진 스모판의 인기는 해가 갈수록 떨어졌지만 다른 생김새의 외국 용병들의 등장은 스모판을 부활시킨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최근에는 이집트 같은 아랍권에도 스모가 수출되며 스모의 국제화가 절정에 달한 듯하다. 아랍권 언론 알 자지라는 지난 7월 아랍권의 스모 열기를 소개했다. 도쿄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스모선수권대회에 단체로 출전한 이집트팀은 헤비급을 포함, 동메달을 2개나 땄다. 스모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되는 선수들로 이룬 쾌거라고 알 자지라는 전했다. 이집트에는 전국적으로 30개 팀에 5000여 명의 스모선수들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유도나 레슬링을 하다가 스모로 종목을 바꾼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이집트 스모 국가대표팀 감독 아메드 모하메드 이브라힘 칼리파는 “아랍국들 내에서 스모는 점점 더 중요한 스포츠가 되고 있다. 모두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라질 전국대회 관중들 몰려

이외에도 남미의 브라질에도 18개 주의 지역 스모 챔피언들이 해마다 모여서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가 열려 수만 명의 일본 내 스모팬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스모가 국제화되는 데 대해 반가워하는 기색이지만 일부에서는 반감도 나타낸다. 2000년 전통의 스모는 일본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외지인들이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유타카 마쓰무라 일본 스모협회 회장은 “스모의 국제화에 대해 모든 일본인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스모가 세계화되는 양상은 다른 인종에 배타적인 일본이라는 나라가 세계에 마음을 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도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일본이 아직 이방인들에게 완전히 마음을 못여는 나라인 만큼 일본 내 외국인 스모선수들은 미국 프로농구(NBA)나 유럽 프로축구리그에 진출한 외국인 선수들이 누리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부 일본인들은 유럽 출신 스모선수들이 긴 팔과 다리로 이점을 누리고 있다며 팔, 다리의 사용을 제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팽창하는 외국인 스모선수들의 기세를 보다 못한 스모협회는 2002년 스모 체육관 1곳당 외국인 선수를 1명만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철저히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체육관들도 손익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들에게 제약을 가하면 가할수록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외국인들에 대한 규제를 두지 않는 스모체육관들이 대개 성적이 좋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입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싱과 마찬가지로 자기 체육관 소속 선수들이 성적이 좋으면 체육관 운영자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제는 외국에 나가 인재들을 발굴해 스카우트해오는 체육관 매니저들도 있다.
물론 금발의 백인이 ‘마쿠우치’에 진출할 경우 일본 정신을 존중한다는 표시로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머리는 검게 염색하고 은행잎 모양의 ‘오이초’ 머리 장식도 써야 한다.

<국제부/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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