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5공청산하는 노태우에 차라리 암살범 시켜 날 죽여라”

2005.08.23

박철언 전 의원 ‘5·6공 비화’ 회고록 파문… “돈봉투 내민 김우중, 이권청탁 안한 이건희”

[정치]“전두환, 5공청산하는 노태우에 차라리 암살범 시켜 날 죽여라”

15년 4개월이 지난 2005년 8월 12일, 박철언씨는 ‘입’을 여는 대신 글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물론 전현직 대통령, 정치인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박철언씨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 중앙)은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자금, 김대중 전대통령의 ‘박철언 후계설’, 그리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울분, 정주영·김우중·이건희·신격호 회장 등 재벌그룹 총수와의 만남이 마치 검찰 기록처럼 낱낱이 정리되어 있어 충격을 준다.

1980년 제5공화국부터 20년에 걸쳐 대통령 정무·법률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대통령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3선 국회의원, 남북비밀회담대표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측 인사들을 42차례나 만났던 그는 권당 300쪽에 이르는 업무 다이어리 20여권, 150쪽의 포켓수첩 120권 등에 깨알같이 메모된 자료를 바탕으로 1106쪽의 정치비사를 풀어냈다. 정치자금 수표 번호 등 관련자료를 치밀하게 모은 것, 그리고 40억 지원 등 유독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가득한 것에 대해 개인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그는 1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40억은 3당 합당에 대한 대가라는 이야기는 너무 지나치고, 야당총재였던 김영삼 총재 입장에서는 정치자금도 필요하고 당시 야당 정치자금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분위기 조성을 위한 자금”이었다며 “앙갚음 차원이라면 1993년 정치보복으로 구속이야기가 떠돌던 때나 1994년 출소한 후에 얘기할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16년이 지난 지금 속죄하는 심정으로 공개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정치]“전두환, 5공청산하는 노태우에 차라리 암살범 시켜 날 죽여라”

‘리틀프린스’ ‘황태자’로 불리던 그가 저자 서문에서 밝힌 책의 집필동기다. 가장 타격을 받았을 김영삼 전대통령측은 입을 다물고 있고 책에 등장한 이들도 묵언중이다.

대형 정치적 사건이나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면 장세동, 이원조, 정태수, 장영자, 권노갑씨 등이 “내가 입을 열면…”이란 말을 했다. 김영배 전의원, 정대철 전의원도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과 관련해 “내가 입을 열면…”이라며 무언가 있는 듯 말했지만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다.

1년 6개월 동안 썼다는 박철언 전의원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비사를 들어보자. 다음은 이 책의 주요내용이다.

전두환 대통령…
뛰어난 용인술, 6·29 선언은 전씨 작품, 노태우에 대한 분노

전두환 대통령의 용인술을 생각하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1981년 당시 청와대비서실은 허화평 보좌관, 허삼수 사정수석, 이학봉 민정수석이 좌지우지했고 이들은 창업공신 심지어 전대통령과 동업자 의식까지 갖고 있었다. 전대통령은 허화평 보좌관을 정무1수석에 임명, 대통령집무실 가까이 방을 두고 사실상 모든 분야에 관여케 하며 관례를 깨뜨렸다. 비서실장실도 별관으로 옮기고 민간출신의 신진엘리트인 나, 김영일, 손진곤을 사정수석실·민정수석실에 배치했다.

1984년 2월, 전대통령은 “김대중이를 미국으로 보낸 것도 나 혼자 구상해서 한 것이다. 모두가 겁을 내서… 미국에서 관심을 끌면 국내 요인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고 아니면 실체가 드러날 것이니 내가 모험을 한 것이다”라고 했다. 전 대통령은 DJ의 미국 행적에 대해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이 될 자격도 없다. 그는 머리 나쁜 선동자에 불과하다”고 불쾌한 듯 말을 뱉었다.

민주화시위가 격렬하던 1986년 9월 26일 전 대통령은 직접 비상계엄 준비 지시를 내렸다. 10월 22일에는 비상조치 날짜로 “11월 4일 미국 중간 선거 결과를 보고 난 후에 11월 7일쯤이 좋겠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전 대통령은 10월 30일에는 “김영삼 김종필은 갑근세도 안 내고 있는데 탈세 혐의로 입건 가능한지 검토하라. 김영삼 김대중의 연행은 보안사에서 하고, 수사는 안기부에서 하라.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을 우선 막아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연말까지 더이상 조치는 없었다.

5공청산 문제와 관련, 1988년 11월 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전 전 대통령은 민감한 정치자금문제를 거론했고 노태우대통령에 대해 격분했다.

[정치]“전두환, 5공청산하는 노태우에 차라리 암살범 시켜 날 죽여라”

“노후보를 당선시키려고 본격적으로 자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당에서 걸핏하면 나보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정치자금이라는 게 주선시에 교섭자와 헌금자가 있어 다 알게 마련이다. 또 당초 약속한 액수와 실제 헌금 액수도 다르다. 당시 당에서 요구하는 돈의 3분의 2도 안되는 돈이 걷혔다. 돈이 부족해 내가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해 가지고 있던 돈까지 당에 주었다. 야당에서 날 비난하는 것이 언론통폐합, 삼청교육 등 정치적으로 독재했고 정치자금을 많이 거뒀다는 것인데 자금과 관련해서는 비난받을 일 없다.

그동안 내가 할 말이 없어 침묵한 것이 아니다. 내가 상당히 무리해서 노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기여했는데 이제 와서 나에게 사과하고 변명하고 재산 헌납하고 낙향하라는 것은 죽어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한 짓이다.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

형님, 처남까지 또 잡아넣겠다는 것은… 검찰에서 고문당했다는데… 전경환에 대한 특별면회도 허용치 않는데… 노태우가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전두환대통령은 박씨를 만나 대선 때 정치자금을 25명으로부터 1010억원 걷었으나 실제 자금은 두 배 이상 들었다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
3당합당 후 대권 약속받은 YS, 노태우대통령에 큰절

야당과 통합을 위해 1988년 9월 21일 상도동에서 YS를 독대했다. YS는 “김대중은 좌경화 우려가 있다”고 했다. 보수대연합 운을 떼자 YS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같은 해 12월 다시 YS를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 의원에 대해 “노사 분규에 개입하여 선동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YS는 “조금 순화시켰다. 크게 야단쳤다”고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3월 야 3당 총재 회담 직후 “김영삼과는 장기 구도의 연계하에 처리하라. 김종필이 여야의 로비로 재미를 보는 것은 시간 문제로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만약 YS가 차기 대권에 관심이 있으면 여당으로 들어와 기반을 닦고 대권을 쥘 길을 뚫어야 한다”고 했다.

1989년 4월 3당통합과 관련 통일민주당 황병태 의원을 만났다. 황 의원은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김대중 총재를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아마 돈과 김일성에게 보낼 친서를 전달한 것 같다”고 했다.

3당통합 중개역을 한 롯데 신격호 회장과 저녁식사를 했다. 신 회장은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YS가 수상, JP는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8월엔 평민당 박상천 의원을 만났다. 박 의원은 “(문 목사 사건 관련) 김대중 총재께서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호남권에서 들고 일어날 것이다. 10월부터 내년 춘투까지 데모가 계속되면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1989년 5월, 상도동 김현철 아파트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나 보수 대연합에 대한 평소 소신을 전하며 20억원(신한은행 본점 영업부, 1989년 5월 30일, 영업부장대리 박상섭, 서울 01-26309, 1억원짜리 수표 20매)과 여비 2만달러를 전했다. 김총재는 “이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부담감을 느끼는데…”라고 하면서 “앞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혁명적인 일입니다”라고 화답했다.

[정치]“전두환, 5공청산하는 노태우에 차라리 암살범 시켜 날 죽여라”

1990년 4월 김복동 의원을 만났더니 “노 대통령은 YS에게 대권을 주기로 최종 결정하고 정식 통고했더니 마룻바닥에서 큰절을 하더라고 각하가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1990년 10월 29일. 언론의 지원사격에 힘을 얻은 YS는 ‘당내 민정·공화계가 추진하는 내각제 개헌은 민자당의 원칙이 아니며 강행될 수도 없다”면서 당무를 거부했고 31일에는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므로 추진할 수 없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마산으로 내려가버렸다. YS는 일단 나를 누르는데 성공하자 나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와 내 주변에 대한 회유의 강온 전략을 번갈아 쓰면서 또 노대통령 주변사람들을 회유포섭하면서 당과 여권을 서서히 장악해 나갔다. 1990년 10월에 있었던 내각제 각서 유출파동은 YS에게는 확실히 굳히기였다. 그래서 내각제 각서를 유출한 것이 고도로 계산된 YS측의 자작극, 고육책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
차기 대권은 박철언씨가.

1989년 1월 19일 DJ와 만났다. DJ는 “내가 김영삼 총재보다 건강하다. 그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늙은 것 같다. 나보다 더 늙어 보인다. 내가 이제 65세지만 대통령을 한 텀은 할 수 있는 건강이다”라고 했다.

1990년 8월 23일 DJ를 장남 김홍일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DJ는 “3당통합은 잘못된 것이다. YS의 정치생명은 실질적으로 끝났다”며 내각제 포기를 요구했다. DJ는 “수십년간 YS를 상대하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배신자인지 말하고 싶지조차 않다”고 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내각제를 실현해서 YS, DJ에게 단기간이라도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김복동 의원은 “노 대통령이 1991년 4월 9일 주례회동에서 YS에게 대권을 주기로 정식 통고했더니 마룻바닥에서 큰절을 했다고 각하가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대선에서 YS가 당선된 뒤인 1993년 1월 5일, DJ를 만났다. DJ는 “YS는 약해 보이고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무자비하게 짓밟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매달리는 사람”이라며 강하게 나가라고 충고했다.

1997년 3월, 힐튼호텔에서 극비리에 DJ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박의원은 이 나라의 미래, 특히 통일을 위해 꼭 필요한 지도자니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영호남의 결합을 통해 국민대화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박의원의 지론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서로 결합하여 다음에는 박 의원이 나라를 맡도록 보장하고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이번에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북방정책 통일문제에 대해 박의원이 하는 일을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성원했습니다”하며 과거부터 나를 믿어왔음을 강조했다.

1998년초, 나는 혹시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통일정책에 관련한 나의 구상을 정리해보았다. 결과적으로 나의 구상은 나만의 구상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재벌회장들과의 만남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김우중 회장이 날 꼭 만나자고 했다.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에서 만나고 자리에 일어나려는데 김회장이 황급히 윗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밀었다. 정색을 하고 거절하자 몇차례 강권하다가 나중에는 “이거 사무실 직원들의 회식비입니다. 약소하지만 고생하는 직원들 회식이나 시켜주라는 뜻이니 거절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그 성의까지 뿌리치는 것은 너무 야박한 듯 싶어 나중에 청와대 사무실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보좌관실 50여명이 회식을 몇백번 하고도 남을 큰 돈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시 힐튼호텔에서 김회장을 만나 정중하게 봉투를 내놓았다.

소탈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이건희 회장은 한번도 이권과 관련된 부탁을 한 일이 없으며 내 성격을 알기에 정치자금 지원 같은 어색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후 내가 힘든 야당 생활을 하는 동안 공개 행사장에서 가끔 반갑게 얼굴을 마주하는 정도지만 나는 그에게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 2004년 둘째딸 상영의 결혼식 때에도 이회장은 삼성문화재단 한용외 사장을 통해 축하금 100만원을 전해와 나는 즐겁게 받았다.

정주영 회장은 대통령 선거 패배 후에도 정치를 계속해 명예회복을 할 생각이었으나 검찰에 기소되고 출국금지를 당하면서 혼비백산, 마음을 바꿨다. 1993년 2월 9일 비공개로 열린 의원총회장에서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대표직을 물러나고 정치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양김씨를 개인적으로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도 내 자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대선 결과를 보니 총선과 달리 모두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경제계로 돌아가겠습니다.”

정회장이 손을 떼자 국민당 의원들이 썰물빠지듯 당을 떠났다. 제2야당은 하루아침에 당사가 폐쇄되고 광화문 거리에 급조 천막을 치고 연명해야 하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소름끼치는 정치보복의 막은 이미 오르고 있었다.

<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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