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 이끌던 마스하도프 러시아군에 사망… 전직 대통령들 모두 목숨 잃어
강대국에 맞선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가시밭길인 모양이다. 체첸 반군 지도자 아슬란 마스하도프(53)가 지난 3월 8일 체첸 북부 톨스토이 유르트 지역에서 러시아 특수부대원들의 공격을 받아 끝내 사살됐다. 1992년 대(對) 러시아 투쟁에 뛰어든 지 13년 만이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몇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지만 전직 대통령까지 지낸 마스하도프의 죽음이 체첸의 독립항쟁사에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반면 통치자로서 그의 능력은 무기력했고 러시아 협상파라는 비난 속에 불안한 집권기를 이어가야 했다. BBC뉴스에 따르면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1998~1999년에 외국인 근로자, 러시아 사절단 등 수백명이 체첸에서 인질로 붙잡혔을 만큼 치안은 불안했고 체첸 인근 다게스탄에서 러시아인들을 쫓아내려는 체첸 군벌을 장악하지 못해 러시아와의 관계도 한층 악화됐다.
온건파 모슬렘인 마스하도프는 또한 체첸의 전통 종교인 이슬람 부흥을 위해 애쓰며 이슬람 국가 건설을 지향했지만, 이로 인해 와하비즘(일종의 이슬람 원리주의 종파)으로 알려진 강경 원리주의자가 득세하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1999년 러시아 군대가 다시 체첸으로 밀려들자 마스하도프 정부는 사실상 해체됐고 그는 다른 군벌들과 '불편한 공조' 아래 다시 대 러시아 투쟁에 나서게 된다.
비운의 체첸 대통령 마스하도프의 죽음으로 체첸에서 대통령을 지낸 인물은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1991년 이후 체첸 독립 열기에 편승해 대통령에 오른 인사들은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고, 반대로 러시아가 체첸을 장악한 2000년 이후 들어선 친러 성향 대통령들은 독립을 추진하는 무장세력에 의해 차례로 제거됐다. 이로 인해 체첸에서는 정부건 반군이건 간에 지도자가 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먼저 1991년 체첸 독립을 선언하며 러시아와 전쟁의 포문을 열었던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1996년 4월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즉사했다. 당시 두다예프는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위성을 통한 위치 추적에 나서 그의 소재를 확인한 뒤 미사일을 발사해 사살했다.
1996년 러시아와 제1차 체첸전쟁을 끝낸 뒤 1997년 1월 마스하도프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 임시로 대통령직을 맡았던 젤림한 얀다르비예프도 지난해 2월 카타르 도하에서 자동차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얀다르비예프 살해는 러시아가 정보요원을 파견해 직접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도하에서는 사건 직후 러시아인 정보요원 2명이 체포돼 카타르 법원에 넘겨졌지만 러시아 당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정보요원들은 러시아에 넘겨졌다.
지난 8일 사망한 마스하도프도 대통령 재임 당시 협상파, 실용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강경파인 샤밀 바사예프 전 체첸 반군 사령관의 암살 기도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바사예프와 손 잡고 1998년 다게스탄을 침공하면서 바사예프의 공격 위협은 줄었지만, 이번에는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지난해 북오세티아 공화국 학교 인질극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는 등 러시아의 표적이 됐다.
체첸 무장세력의 강경투쟁을 이끌고 있는 바사예프는 2000년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세를 받아 퇴각하는 도중에 로켓포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알하노프 대통령 역시 체첸 반군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어 하루 앞을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피의 보복전' 이어질 듯 친러 성향의 람잔 카딜로프 체첸 부총리는 3월 8일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과 인터뷰에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그를 생포하려 했지만 (마스하도프)경호원들이 총기를 오발하는 바람에 마스하도프가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NTV 등은 FSB요원들이 마스하도프 은신처에 수류탄을 던졌다고 하지만 시신에 상흔이 없는 점 등을 의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사인이 무엇이건 향후 체첸의 대 러시아 저항은 한층 과격해질 전망이다. 러시아와 정면충돌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 거주하는 마스하도프의 아들 안조르가 즉각적인 보복을 다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안조르는 “우리는 오로지 강해지기만 할 것“이라며 “체첸 주민의 투쟁정신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한편 마스하도프의 최후는 묘하게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닮아 눈길을 끈다. 강대국인 러시아와 미국에 맞서 민족자존을 외치던 두 사람은 전직 대통령 출신이며 그들의 목에는 1000만달러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또 오랫동안 도피중이던 이들은 친척이 거주하는 변두리 농가의 비밀 콘크리트 지하벙커에서 적 특수부대와 맞닥뜨렸고 당시 그들의 곁에는 경호원 몇명이 함께 있었다.
물론 마스하도프는 투항을 거부한 뒤 장렬히 전사하고 후세인은 항복해 목숨을 건졌다는 차이는 있다.
<국제부/이상연기자 lsy77@kyunghyang.com>